한말 의병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72
한자 韓末義兵活動
이칭/별칭 한말 의병,구한말 의병 운동,의병 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1895년~1911년 사이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의병 운동은 집권층이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서 외세가 침략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 형태였다. 의병 운동은 일제의 대한 제국 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여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의병 운동의 전개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을미의병[1895~1896]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을사의병[1905~1907]은 강제적 을사조약 체결이, 정미의병[1907~1910]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주요 배경이 되었다. 특히 정미의병의 경우 해산 군인이 의병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항쟁이 전쟁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의성 지역의 의병 운동은 1차 의병 운동인 을미의병 단계와 3차 의병 운동인 정미의병 단계 등 두 단계에서 중점적으로 전개되었다.

[의성군의 항일 의병 운동]

의성에서의 을미 의병 운동은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는 의병장에 김상종(金象鍾), 초모장에 김수욱(金壽旭), 중군에 권대직(權大稷), 선봉장에 김수빙(金壽聘), 관향장에 김수협(金壽莢)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점곡면의 유생들로서 을미년(1895)에 명성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 소식을 들은 후 궐기하였다. 일제의 침략 행위에 분개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전투 경험과 무기 수준이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점곡 일대에서 물러나 6㎞ 정도 떨어진 황산(黃山)으로 후퇴하였다.

황산은 약 80도의 경사와 절벽을 이루는 곳으로 남천이 우측을 끼고 흐른다. 동편 산등을 완만하게 타고 오르면 가파른 산세가 나타나면서 이끼 낀 산성이 산 정상을 끼고 3㎞가량 뻗어 있으며, 경사 70도를 이루면서 석축 산성이 견고하게 쌓여 있다. 황산에 진지를 구축한 의병진은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빙, 김수협을 포함하여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했다.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 출신의 의병장 이필곤(李苾坤)은 1896년 2월 일본의 침략에 분개해 향내 청장년에게 통문을 돌려 창의를 주창하였다. 그 뒤 의병 진영을 갖추고 춘산면의 사미(思美)와 옥산면의 황산에서 적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을 못이긴 조선 왕실이 부대를 해산하라는 조칙을 내리게 되었고, 이에 통한을 품고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이필곤은 1907년 7월 3일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었고, 마침내 일본군 안동 수비대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의 의병장 박연백(朴淵伯)은 1906년 공산(孔山)에서 기병하였다. 의병 부대의 규모는 약 300명 정도로 구성되었고, 의성·금성·의흥·신녕·영천·영일 등에서 활동을 하였다. 산남 의진(山南 義陣)의 입암 전투에 참가했다가 많은 군사를 잃었고, 그 뒤 1909년 12월 무렵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이들 외에도 자료에 따르면 1907년 11월 25일에 의성에서 약 50명의 의병 부대가 활동을 벌였고, 1908년 2월에도 의성에서 두 차례 의병 부대가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의성 출신으로 타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펼친 이로는 조용필과 조용구 등이 있다. 이들은 이강년(李康秊)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이강년은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무려 50여 회의 전투를 벌여 일본군에 승리하는 전과를 올렸고, 13도 연합 의병 부대가 편성될 때 호서 창의 대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부대는 1908년 7월 충청도 제천 남쪽에 위치한 작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일본군 제천 수비대의 급습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고, 이강년은 같은 해 10월 13일 형장에서 순절하였다. 이강년의 『장임록(將任錄)』에 따르면, 의성 출신의 조용필은 소모장(召募將)으로, 조용구는 좌종사(座從事)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지역은 전국에서도 의병 운동이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지역으로서, 1차 의병에서 3차 의병에 이르기까지 의병 운동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전개된 특징을 보였다. 경상북도 지역의 의병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908년 무렵이었고, 그 가운데 특히 접전이 많이 이루어진 지역은 영주·봉화·영일·울진 등지로서, 대부분 험준한 산악 지형을 배경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의성은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또한 이강년 부대에서 활동한 조용필과 조용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의성 출신의 의병들은 타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러한 의성 지역의 의병 운동은 이후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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