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34
한자 鄒文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형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비정 지역 추문촌 - 경상북도 의성군 일대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신라 시대 지명.

[개설]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위치한 조문국은 신라에 의해 멸망한 후 조문군으로 편제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매조홀현(買召忽縣)’은 ‘미추홀(彌鄒忽)’로 표기된 바 있고, ‘미추(未鄒)’ 이사금을 ‘미조(未召)’라고도 표기하기도 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통해서 ‘조(召)’와 ‘추(鄒)’가 서로 환치할 수 있었던 이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추문촌(鄒文村)조문군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고 여겨진다.

[명칭 유래]

추문촌이라는 지명은 540년대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 적성비」의 “추문촌 당주 사탁부 도설지 급간지(鄒文村幢主 沙喙部 噵設智 及干支)”라는 기록에 등장한다. 또한 함안의 성산산성 출토 목간들에서도 “추문 비시아촌(鄒文比尸阿村)”, “추문 아나모지촌(鄒文阿那牟只村)”이라고 하여 ‘추문(鄒文)’이라는 명칭이 전하고 있다. 함안 성산산성 목간은 561년(진흥왕 22)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한산주조에 보면 오늘날의 인천인 ‘매조홀현(買召忽縣)’은 ‘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 왕력 기이편을 보면 ‘미추(未鄒)’ 이사금을 ‘미조(未召)’라고도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조(召)’는 ‘추(鄒)’는 서로 환치할 수 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추문(鄒文)’은 ‘조문(召文)’과 동일한 지명을 가리키는 이표기(異表記)였음이 확인된다.

1864년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조문국이 멸망하고 조문군이 되었다”라고 기록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조문국을 해체하고 조문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신라는 조문국의 지배층을 외위 체계에 편제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양 적성비」와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 보이는 “추문 비시아촌(鄒文比尸阿村)”, “추문 아나모지촌(鄒文阿那牟只村)”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사로국은 의성 지역에 있던 조문국을 정벌하면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내용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김해의 금관가야나 고령의 대가야의 예를 통해 볼 때 신라는 다른 나라를 병합한 뒤, 그 국명을 지방 행정명으로 사용하고는 하였는데, 조문국 역시 마찬가지여서 조문군이나 추문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추문촌이 위치한 의성 지역은 소백산맥 안팎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 경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군사적인 절대 요충지였다. 경주의 사로국은 이곳을 장악하여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고, 북방에서 정치 변동 등의 이유로 이곳으로 남하하는 유이민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성이 축성되었다는 것은 군치로서 해당 지역의 중심지임을 말하는데, 이와 관련해 「단양 적성비」에 보이는 추문촌 당주의 존재가 주목된다. 당주는 주(州)에 설치된 군주보다 하위 단위의 군사 책임자로, 촌이나 성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문촌 당주가 당시 적성 지방의 공략에 참가한 사람인지, 적성 점령 후 그 지방에 설치한 당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비문의 해석에 따라 적성 지방 공략에 참가한 전진 기지의 당주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보더라도 의성 지역은 소백산맥으로 진출하는 신라의 중요한 전진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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