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의 부처미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800
한자 -龜岩-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79년 - 「구암의 부처미이」 『문소의 얼』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2년 - 「구암의 부처미이」 『의성의 전설』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8년 - 「구암의 부처미이」 『의성 군지』에 수록
성격 전설|지명 유래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이여송
모티프 유형 조선의 정기를 끊은 이여송|은혜 갚은 처녀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를 ‘부처미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

[개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부처미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를 담고 있는 지명 유래 전설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병된 명(明)의 장수 이여송이 조선에서 인재가 나지 못하도록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설화와 결부되어 전하고 있다. 부처미이는 돌부처가 길가에 있던 곳으로 1881년 『대동여지도』에는 불현(佛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79년 의성군 교육청에서 발행한 『문소의 얼』에 「구암의 부처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영남 일보』[1973. 5. 26.]의 기사를 참고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이야기 제공자는 점곡 초등학교 김춘호로 기록되어 있다. 1982년 의성군에서 발행한 『의성의 전설』, 1998년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의성 군지』에도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의성 문화 관광’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내용]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龜岩里)의 다른 이름은 ‘부처미이[佛頂]’이다. 지역의 촌로들에게는 ‘구암리’ 보다 ‘부처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부처미이’가 된 것은 잘려진 ‘부처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온다.

의성읍에서 점곡면을 지나 청송군 쪽으로 가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약 1㎞정도 가면 산고개가 있다. 그 고갯길 동편에 수백 년 묵은 소나무가 있는데 그 밑에 부처님이 길을 향해 정중히 앉아 있다. 신라 시대 불상의 양식을 갖춘 이 석불은 몸체만 옛 것이고 머리 부분이 없던 것을 1967년에 시멘트로 만들어 붙였다. 구암리부처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석불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석불의 머리가 없어진 사연은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선조 25)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군대를 보내 조선을 침략했고, 명(明)은 조선에 원병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때 명의 지휘관으로 온 이가 바로 이여송(李如松)이다. 그는 조선을 도우러 오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원병으로 함께 온 그의 아우 이여백(李如栢)이 곧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탐탁지 않던 일이었는데 사랑하는 아우까지 잃게 되니 그의 슬픔과 불만은 점점 깊고 커져만 갔다.

이여송이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오게 된 것은 명에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던 조선인 황씨(黃氏) 때문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황씨는 많은 귀중품을 가지고 명으로 건너갔다. 어느 날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의 옆방에서 처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관 주인에게 처녀가 우는 연유를 물으니, 그 처녀의 부모가 천 냥이나 되는 빚을 져서 자신이 몸을 팔아 그 빚을 갚으려고 하나 임자를 만나지 못하여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황씨는 순수한 마음으로 돈 천 냥을 내어 주고 부모를 구하게 하였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처녀는 명의 병부 상서인 석성의 부인의 되었다.

그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급기야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 일행을 보내게 되었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얼마 가지 않아서 어느 여관에 묵게 되었다. 그 여관의 노파가 사신 일행에게 이여송의 초상화를 내어 보이면서 지략이 뛰어난 이 사람을 꼭 장수로 모셔 가야만 한다고 일러 주었다. 다음 날 길을 떠나 북경에 도착한 일행은 조선의 긴박한 사정을 전하고 조속히 구원병을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명의 황제는 두 명의 장수에게 4만 장병을 이끌고 가서 조선을 도우라고 지시하였다. 그 두 장수 중에 바로 이여송이 들어 있었다. 여관의 노파에게서 이여송의 명성을 익히 들은 사신 일행은 이여송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때 석성의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이러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조선인 황씨에게 은혜를 갚을 방도를 생각하던 중, 이여송을 보내어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 것이 그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러한 뜻을 전달하였고 석성은 황제에게 이여송을 조선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결국 이여송은 원치 않던 조선으로의 출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이여송은 조선인 황씨에 대해 몹시 분노하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조선을 도우러 갈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아우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석성의 부인을 도왔던 황씨는 고향이 청송(靑松)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홍순언(洪純彦)[1530~1598]의 성이 이 지방에서 와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황씨의 고향을 알게 된 이여송은 황씨를 찾아 죽여 버리기로 마음먹고 청송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그런데 청송으로 가던 도중 의성 구암리에 이르자 갑자기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워 하던 이여송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길 동편에 있는 석불을 발견했다. 이 석불의 조화로 말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여송은 긴 칼을 빼어 휘둘러 석불의 목을 베어 버렸다고 한다. 이여송의 칼에 부처미이 석불의 목이 잘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여송은 한이 풀리지 않아 깊은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산의 혈을 끊었다고도 한다.

한편 6·25 직후 이 지역의 초등학교에서는 부처목 찾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머리가 인근에 있는 가낙골 못에 빠졌다는 얘기가 있어 가뭄 때 못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구암의 부처미이」의 주요 모티프는 ‘조선의 정기를 끊은 이여송’, ‘은혜 갚은 처녀’이다. 자신이 조선으로 파병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여송이 자신의 파병에 원인 제공을 한 조선인 황씨를 죽이지 못하고 대신 불상의 머리를 자른 것이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 산의 혈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임진왜란 이후 전해지는 설화 중에 이여송과 관련되는 것이 곳곳에서 전하는데, 이 이야기도 그런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로,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에 있는 제비원 미륵불의 머리를 이여송이 잘라버려 다시 만들어 붙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여송은 조선에서 인재가 나지 못하도록 전국 명산의 혈을 끊다가 변신을 하고 나타난 산신령에게 혼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개설]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 부처미이는 돌부처가 길가에 있던 곳으로
1881년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불현(佛峴) 고개로
표시되어 있음을 명기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내용 추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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