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재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967
한자 李寬在
이칭/별칭 순교(舜敎),신암(愼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 1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하창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5년연표보기 - 이관재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이관재 사망
묘소|단소 효자비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덕수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영천(永川)

[정의]

개항기 의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순교(舜敎). 호는 신암(愼庵). 이민환(李民寏)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이노성(李魯誠)이며, 어머니는 아주 신씨(鵝洲 申氏) 이광철(李光哲)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해발(李海發), 증조할아버지는 이의만(李宜晩), 고조할아버지는 이성천(李性天),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 金氏) 이헌(李巘)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장봉(章鳳)이며, 그 다음은 장귀(章龜), 장린(章麟)이고, 딸은 정희원(鄭羲源), 김현목(金顯穆)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활동 사항]

이관재(李寬在)[1845~1896]는 배움을 실천에 옮기는 곧은 성품의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어 분가한 뒤에도 비바람을 아랑곳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을 드렸다. 어머니가 친정에 대를 이을 혈육이 없는 것을 늘 마음의 짐으로 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재산 반을 털어 외가의 위토(位土)를 마련하고 후사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했다.

1896년 11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에서 의성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가족들을 먼저 피난시키고 자신은 아들 이장봉(李章鳳)과 함께 묘우(廟宇)를 지켰다. 그런데 전투가 너무도 치열해 어쩔 수 없이 선조의 위패를 안고 피신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빗발치는 유탄을 피하지 못하고 위패를 안은 채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쏟아지는 총탄을 막으려 자신의 몸으로 가리며 두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총탄을 어찌 맨몸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아들의 열 손가락은 총탄에 모두 날아가고, 두 사람의 몸은 벌집이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덕수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 곁에 효자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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