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장서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78
한자 巴里長書事件
이칭/별칭 파리 장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의성 출신의 권상두가 포함된 유림 세력이 1919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 승인 청구권을 제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

[개설]

1919년 3·1 운동 이후 유림 세력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중 유림이 빠져 있다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다루는 목적으로 개최된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조선 유림이 대표가 되어 ‘조선 독립 승인 청구서’를 제출하려고 하였다. 이를 파리 장서 사건이라 한다.

[역사적 배경]

1910년대 국외에서 민족 자결 주의가 제창되고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다. 국내에서 일제의 폭압적 무단 통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다. 유림 세력은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3·1 운동의 뜨거운 열기를 독립 청원 운동으로 발현하고자 하였다.

[경과]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의 만세 시위 상황과 파리 만국 평화 회의 등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1 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작성하고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곽종석 역시 3·1 운동에 유림이 제외된 사실을 아쉬워하며 김창숙(金昌淑)과 상의하여 유림이 독자적인 행동을 추진하기로 의논,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 요구를 밝히고 이를 청원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성주의 송준필은 그의 종택인 성주 백세각에 친족과 자제들을 불러 모아 파리 장서를 제출하고 독립 시위를 전개하기로 했다. 그 후 연락 본부를 백세각으로 정하고, 김창숙·송규선으로 하여금 곽종석과 협의하여 청원서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는 한편, 셋째 아들 송수근을 장석영에게 보내어 국내 유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작성케 하고, 송희근과 여보회가 경비를 부담하여 취지문을 인쇄한 다음 이를 여러 유림에게 돌리면서 1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유림이 서명한 청원서는 상해 임시 정부와 연관이 있는 김창숙이 상해로 가져가 그곳에서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하여 영문본은 파리 만국 평화 회의와 구미 각국에 보내고, 한문본은 중국 각 요로에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송준필장석영은 청원서를 외국과 평화 회의에 보내는 것은 매우 우원하다 하여 조선 총독부에 보낼 조선 독립 청원서를 초안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며 파리 장서 사실도 탄로 나고 말았다. 의성 지방 출신 유림으로서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은 의성군 단밀면 생송동의 권상두(權相斗)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결과]

유림들의 독립 청원 운동은 1919년 4월 2일 성주의 만세 시위 운동 때 이와 관련된 유림들이 체포됨으로써 파리 장서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에 곽종석, 장석영, 송준필 등 20명이 일제 관헌에 탄압을 받았다. 권상두는 의성의 유림을 대표하여 서명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기소되어 재판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 의 독립 선언서에 참가하지 못한 유림 세력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독립 선언서 서명에 빠진 오명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유림 세력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됨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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