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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고 선생의 청백」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751
한자 -江皐先生-淸白-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도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8년 - 「강고 선생의 청백」 『의성 군지』에 수록
성격 전설|인물 전설
주요 등장 인물 강고 유심춘|부인|하인|후임
모티프 유형 청백리|선정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의성 현령 유심춘에 대한 이야기.

[개설]

의성 현령을 지냈던 강고 유심춘의 청백한 인품과 선정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인물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8년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의성 군지』「강고 선생의 청백」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의성 문화 관광’ 홈페이지에도 같은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내용]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 선생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선비나 관리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청빈한 삶을 살아서 청백리로 널리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7대조이고,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는 그의 아들이다.

유심춘은 우천(愚川)[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이 고향이지만 의성 현령을 지내면서 보여준 훌륭한 인품으로 인해 의성군에도 유심춘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1816년(순조 15) 3월, 강고 선생은 54세의 나이로 내직에서 고향이 가까운 곳을 자원하여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여 왔다. 그의 선정은 널리 알려져서, 심한 흉년으로 유랑하던 일부 백성들이 선생의 이름을 전해 듣고 모여들어 의성에 안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심춘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루는 고향인 우천에서 하인이 문후를 왔다. 강고 선생은 반갑게 맞으며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하인이 전하기를 우수기라서 집에 물이 샌다고 하였다. 그런데 명색이 현령이니 목돈을 마련하여 주면서 집을 수리하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겨우 몇 푼만 쥐어주고는 돌아가는 길에 바가지를 서너 개 사가지고 가서 많이 새는 데나 우선 받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의성 현령을 그만두고 떠날 때의 일도 전한다. 당시에는 사임하고 가는 관료에게 판공비를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강고 선생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완강히 거절하고 근봉(謹封)하여 후임에게 넘기고 갔다. 선생의 후임은 이게 웬 횡재냐며 그 돈을 삼켰고, 자기의 몫을 또 다시 책정했다고 한다.

한편 판공비 문제로 다소 양심의 가책을 느낀 후임 현령은 훗날 자신의 아들이 권세가로 있을 때에 강고 선생의 아들 유후조를 발탁하라고 일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강고 선생은 임지를 떠날 때 재직하는 동안 얻은 것은 쌀 한 톨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심지어 부인의 망아지며 물레도 모두 두고 가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은 향년 73세에 별세했고 1841년(헌종 7)에는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묘는 의성군 다인면 도암리 마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그가 의성에서 머문 것은 불과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그의 선정과 인품은 지금도 의성군민의 가슴에 남아 있다.

[모티프 분석]

「강고 선생의 청백」의 주요 모티프는 ‘청백리’와 ‘선정’이다. 선생은 청백한 인품과 선정으로 고향뿐만 아니라 현령을 지냈던 의성에서도 그에 대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풍산 유씨 가문에서는 가문을 빛낸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참고문헌]
  • 『의성 군지』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
  • 의성 문화 관광(http://tour.usc.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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