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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364
한자 鳳岡祠
이칭/별칭 봉강재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가산리 77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14년연표보기 - 봉강사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 - 봉강사 훼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 - 봉강사에 화수헌 이선생 유허비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5년 - 봉강사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6년 - 봉강사 보수
현 소재지 봉강사 -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가산리 776지도보기
성격 사우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벽진 이씨(碧珍 李氏) 문정공파(文靖公派)
관리자 벽진 이씨(碧珍 李氏) 문정공파(文靖公派)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사당.

[개설]

봉강사(鳳岡祠)이극송(李克松)[1202~1274]과 7세손 이세남(李世南)[1464~1525]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우이다. 이극송의 본관은 벽진(碧珍), 호는 빙옥재(氷玉齋),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이규보(李奎報)의 문인이다. 「봉강재기(鳳岡齋記)」를 보면, 이극송은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일찍이 왕으로 부터 ‘차가운 옥 같은 곧은 자태와 가을물 같은 정신을 지녔다[寒玉貞姿, 秋水精神]’라 칭찬을 받고 ‘빙옥(氷玉)’이란 호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세남의 호는 화수헌(花樹軒)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가 되었으나 사화를 피해 은둔하였다. 경상북도 성주에서 의성 가음리로 이주하여 처사로 살면서 당대 명류들과 두루 사귀었는데, 특히 이언적(李彦迪)과 우애가 돈독하였다고 한다.『계몽가석리(啓蒙歌釋理)』 등의 저술이 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위치]

봉강사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가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음 초등학교에서 가산 2리 경로당 방향으로 400m가량 이동하다가 왼쪽으로 난 가산 1리[경로당을 15m 정도 앞둔 지점] 길을 따라 120m가량 올라가면, 봉강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강재기」에는 “문소(聞韶)[의성]의 비봉산(飛鳳山)은 용이 꿈틀거리듯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아름다운 기운을 품고 있으니, 이 고을의 진산이다. 그 아래에 가음리가 있다. 마을에는 예전에 봉강사가 있었으니, 바로 벽진 이씨 문정공 빙옥재(氷玉齋)화수헌(花樹軒) 두 선생을 제향 하는 곳이다.” 라고 묘사되어 있다.

[변천]

1944년에 이종익(李鍾翼)[1886~1951]이 쓴 「봉강재기」를 통해 봉강사의 내력을 살펴볼 수 있다. 1714년(숙종 40)에 의성 지역 사림의 여론에 따라 이극송이세남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870년(고종 7)에 조정의 명령에 의해 훼철되었는데 건립부터 훼철 시기까지의 역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훼철 당한 후 오랜 기간이 흐른 뒤 비석을 세우고 재사(齋舍)를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0년 건립된 화수헌 이선생 유허비(花樹軒 李先生 遺墟碑)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사우를 중건하면서 봉강사에서 봉강재(鳳岡齋)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유허비를 보호하기 위해 유허비각을 세웠는데 을사년이라고 기록된 상량을 보아 1965년으로 추정된다. 2006년 봉강재 전면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봉강재의 동남쪽에 관리소를 짓는 등 대대적인 보수 작업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기록의 부족으로 조선 시대 건립되었던 봉강사의 형태와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현재 봉강사가 있던 자리에는 1910년 경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강재와 화수헌 이선생 유허비, 그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1965년에 세워진 비각 등이 자리하고 있다.

봉강재는 전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m 정도를 돌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30㎝ 정도 시멘트 기단을 만들어 자연석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다. 가운데는 마루를 놓고, 양쪽에는 온돌을 깔았다. 건물의 전면과 동쪽, 어칸의 뒤쪽에 퇴칸을 두었다. 봉강재 어칸에 이홍(李鴻)이 쓴 ‘봉강재(鳳岡齋)’ 현판이 걸려 있고, 어칸의 마루 북쪽 벽 위에 이종익이 쓴 「봉강재기」, 동쪽 온돌이 전면에 이우식(李愚植)이 쓴 「한옥정자추수정신(寒玉貞姿秋水精神)」 현판이 걸려 있다.

봉강재 동편에는 3단의 계단을 설치하여 유허비각이 있는 곳으로 쉽게 통하도록 하였다. 이세남 유허비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을 얹었고, 지붕 양쪽은 방풍판을 달았다. 비석의 주위는 자연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붉은 홍살로 에워싸서 출입을 금지하였다. 비각의 둘레는 남서쪽으로는 자연석의 기단 위에 붉은색 벽돌로 담을 쌓고, 벽돌 위에 쇠살로 무늬를 만들었고, 동북쪽에는 벽을 발라서 서로 연결하였다.

[현황]

조선 시대 봉강사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고 현재에는 1910년 중건된 봉강재가 자리 잡고 있다. 봉강재는 비지정 문화재로, 사우를 활용한 프로그램은 개발되지 않았다. 매년 1회 음력 10월 마지막 일요일 향회를 지내고 있다. 유허비에는 매년 춘추에 이극송, 이세남 두 선생의 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는 문중이 쉽게 모일 수 있도록 바꾸어 묘사를 지낸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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