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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067
한자 朴永和
이칭/별칭 朴英和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9년 5월 9일연표보기 - 박영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2일 - 박영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6일 - 박영화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23년 7월 24일연표보기 - 박영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박영화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박영화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영화(朴永和)[1859~1923]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면서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평양 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 또한 3월 10일 대구 남문 밖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괴산동 교회의 박우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으로 3월 8일 전개된 대구 서문 시장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아들 박상동(朴尙東) 등으로부터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의성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로 계획하였다.

박영화는 “나는 일찍부터 한국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는데, 지금 경성·평양·대구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조선인으로서 묵시할 수 없다”고 말하며, 동생 박영신(朴永新)·배달근(裵達根)·김원휘·박영달(朴永達)·배중엽(裵重曄) 등과 여러 차례 만나 3월 13일 쌍계동에서 시위를 거행하기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3월 12일 박영신의 집에서 박영달·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고창하고 정오 무렵 학생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동민들은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박영신의 집 앞 도로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박영화·박영신·배중엽 등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자 시위 군중들은 이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동리를 시위 행진하였고,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였다.

그날 오후 4시 급보를 받은 의성 경찰서에서는 조선인 경부와 순사 부장을 급히 파견하여 비안 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동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 모두 18명이 기소되어 형을 받았다. 박영화는 4월 26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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