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059
한자 朴尙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6월 2일연표보기 - 박상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박상동 대구 서문 시장 독립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8일 - 박상동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음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박상동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2월 9일 - 박상동 일본 나고야 검사국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43년 1월 26일 - 박상동 기소 유예로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21일 - 박상동 일본 야마구치현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 유예 3년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58년 5월 4일연표보기 - 박상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박상동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박상동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밀양. 1919년 3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 교회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한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장남이다.

[활동 사항]

박상동(朴尙東)[1894~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8일 대구 계성 학교(啓聖學校) 재학 중 대구 서문 시장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0일 계성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비안면 쌍계동으로 귀향하여 대구에서 전개된 시위 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동년 4월 18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기독교 목사로써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 의식의 고취, 일제의 식민 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 요배와 신사 참배 반대 등의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9일 김은석(金恩錫) 등과 독립 사상을 고취하다가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나고야[名古屋] 검사국에 체포되어 1년 1개월간 미결수로 취조를 받고, 1943년 1월 26일 기소 유예로 석방되었다.

그 후 다시 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8월 21일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