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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917
한자 申鳳錫
이칭/별칭 자족재(自足齋),석여(錫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1년연표보기 - 신봉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신봉석 성균관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신봉석 응제시에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신봉석 한성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신봉석 성시에 낙방
활동 시기/일시 1677년 - 신봉석 「진오폐소」 올림
몰년 시기/일시 1704년연표보기 - 신봉석 사망
거주|이주지 신봉석 거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신봉석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신안리 의곡
성격 유학자
성별
본관 아주(鵝洲)
대표 관직|경력 선교랑(宣敎郞)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석형(錫亨). 호는 자족재(自足齋).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신견(申堅), 어머니는 신효성(申孝誠)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할아버지는 신사도(申師道),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역임한 신심(申伈), 부인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경(金鏡)의 딸 의인(宜人)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활동 사항]

신봉석(申鳳錫)[1631~1704]은 1631년(인조 9)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덕과 총명을 보여주어,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한다. 7세 때 신봉석이 ‘학서(學書)’를 청하였는데, 몸이 유약하다며 부친이 허락하지 않았다. 13세 때에는 부친이 통발 속의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자, 신봉석은 단지 잉어 한 마리만 가지고 왔다. 부친이 그 까닭을 꾸짖어 묻자 신봉석은 “차마 모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특히 신봉석은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지는데, 부친의 병환 때에는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오고 상분(嘗糞)하며 간병하였다. 또한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했는데, 모친이 20리 밖에 떨어져 계셨기에 매일 곡을 하면서도 가서 살피기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몸가짐도 단정하여 의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없었다고 하며, 부모 제사 때가 아니면 함부로 돼지와 닭을 도살하지 않았다.

신봉석은 부친의 계(階)로 인해 선교랑(宣敎郞)에 통적(通籍)되었으며, 일찍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1655년(효종 6) 어느 날 성균관의 모든 유생이 삼청동(三淸洞)에 놀러 갔지만, 오직 신봉석과 호남의 한 유생만이 성균관을 지키고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효종이 불시에 성균관에 내시를 보내어 두 유생에게 친히 시제를 내려 글을 짓게 하니, 둘 중 장원은 신봉석이 차지하였다. 이에 효종신봉석에게 집을 내리려 했지만,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종이·붓·먹만 상으로 내렸다. 1657년(효종 8) 한성시(漢城試)에는 급제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자족재(自足齋)’라는 호를 짓고 편액(扁額) 한 뒤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고향에 있으면서도 국사에 대해서는 매우 강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677년(숙종 5) 「진오폐소(陳五弊疏)」를 올렸는데, 이는 당시의 폐단을 5개조로 나누어 지적한 것으로, 그 첫째가 세금 징수의 폐단, 둘째가 군역의 폐단, 셋째가 가난한 백성이 더 가난해지는 폐단, 넷째가 영남의 인재를 쓰지 않는 폐단, 다섯째가 인재 등용의 폐단이다. 이어 신봉석은 「의청영남행경대동소(擬請嶺南行京大同䟽)」라는 상소를 올려, 대동법(大同法)의 영남 지역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거처를 지금의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로 옮겼으며, 초택(草澤)에서 머물다 1704년(숙종 30)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신봉석의 문집으로는 3권 1책의 『자족재유집(自足齋遺集)』이 전한다. 이 책은 신봉석의 8세손 신용섭(申龍燮)이 편찬하였으며, 1921년경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권2에 신봉석이 올렸던 두 편의 상소문인 「진오폐소」와 「의청영남행경대동소」, 그리고 「자족설(自足說)」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신봉석은 「자족설」에서 “자족의 도는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에 있으니 그것을 취하여도 금하는 것이 없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않는다.”라며 자족의 의미와 자신의 신념을 풀이해 놓았다.

[묘소]

『자족재집(自足齋集)』 묘갈명에는 현의 서쪽에 위치한 의곡(蟻谷)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신안리이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용연리신봉석의 학문과 효행을 기리기 위한 재사인 자족재(自足齋)가 건립되어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신** 자족재집에는 그때 장원했던 시가 실려있다. 응제시는 관료들만 치는 시험이다. 그리고 내시를 보내어 두명만 응제시를 보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잘못된 것이다. 자족재집 행장을 보면 알 수 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주신 내용에 따라 자족재집 행장을 토대로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5.05
신** '이때 효종이 불시에 성균관에 내시를 보내어 두 유생만 응제시(應製試)를 치게 하니, 둘 중 장원은 신봉석이 차지하였다.' 이부분은 잘못되었다. 효종이 두 유생에게 정시에 응시할 수 있게 했는데 춘당대정시에서 신봉석이 장원하였다. 그러나 장원을 차지한 신봉석의 시에 시대를 비방한 불온한 의미가 있다고 대간들이 의론을 제기하여 파방이 되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주신 내용에 따라 자족재집 행장을 토대로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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