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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704
한자 倂方里山城址
이칭/별칭 마령산성(馬嶺山城),고구고현성(高邱古縣城),마령성(馬嶺城),구화성(仇火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38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신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7년 - 병방리 산성터 지표 조사 실시
관련사항 시기/일시 2004년 - 병방리 산성터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시 지표 조사 실시
소재지 병방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38 일원지도보기
성격 산성|산성터
소유자 사유지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에 있는 산성 유적.

[개설]

병방리 산성터 유적은 해발 365.8m의 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완만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성의 북쪽은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어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돌로 성벽을 쌓았다.

[변천]

병방리 산성터 유적의 변천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 기록은 1832년경에 발간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의성현지(義城縣誌)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마령산성(馬嶺山城)은 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전해오는 말로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할 때 이 성을 쌓았다고 하며, 둘레는 3리이고 성내에는 우물터가 완연하게 남아 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馬嶺山城 在縣北三十里 世傳 高麗恭愍王 避紅巾賊 築是城 周回三里 內有井基宛然 今廢]” 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871년 간행된 『영남읍지(嶺南邑誌)』의 의성현지(義城縣誌)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1864년경에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김정호(金正浩)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고구고현성(高邱古縣城)은 마령성(馬嶺城)이라고도 부르며 북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3리이며, 신라 소지왕(炤知王) 7년에 축조한 구화성(仇火城)이 바로 이것이다[高邱古縣城 一云馬嶺城 北三十里 周三里 新羅炤知王七年築仇火城者是]” 라고 기록하고 있다. 병방리 산성터로 추정되는 마령산성 혹은 마령성은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의 공민왕 대에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늦어도 1832년 이전에 폐지되었던 것 같다.

[위치]

병방리 산성터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38, 산36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35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능선을 이루며 북쪽으로 발달한 끝부분에 위치하여 미천(眉川)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성 내에서 주변의 조망이 좋아 북서쪽으로 미천 건너편에 있는 관덕리 마산 봉수터를 볼 수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7년 5월~11월 대구 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지표 조사가 있었고, 2004년에는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지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지금까지 발굴 조사는 없었다.

[현황]

병방리 산성터가 위치한 산지는 삼림이 우거져 있어 외견상 성벽의 모습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성벽은 4~4.5m 정도의 높이로 남아 있는데, 거대한 기단석 위에 네모서리를 각이 지게 치석한 석재를 수직으로 쌓아 외벽을 축조하였고, 그 안쪽은 잡석과 흙을 채웠다. 전체 둘레는 750m 정도로서 성 내부에는 망루지 등의 건물지와 우물터 등이 확인되며 일부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병방리 산성터 유적은 『경상도읍지』와 『영남읍지』의 고려 시대 공민왕의 홍건적 피난 기사나, 『대동지지』의 신라 소지왕(炤知王) 7년에 축조한 구화성(仇火城)이라는 기사를 통해 볼 때,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425년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마산 봉화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병방리 산성의 중요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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