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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77
한자 三一運動
이칭/별칭 삼일 운동,3·1 만세 운동,기미 만세 운동,만세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2일 - 비안 공립 보통학교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괴산동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우곡 시장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안평면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6일 - 이두동, 장춘동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7일 - 봉양면 만세 시위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봉양면 만세 시위 종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금성면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안평면 만세 시위 종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봉양면 도리원 만세 시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9~20일 - 점곡면 만세 시위 발생|종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25일 - 신평면 만세 시위 발생

[정의]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3월 12일~4월 초순까지 의성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개설]

3·1 운동 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린 가운데 민족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세계사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발생한 러시아 혁명과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민족 독립 운동이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 운동이 국내외로 번져나갔다. 의성 지역의 3·1 운동은 3월 12일부터 4월 초순까지 군내 12곳에서 19회에 걸쳐 벌어졌다.

[의성 지역 3·1 운동의 전개]

1. 비안 공립 보통학교 만세 시위

의성 지역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첫 시위는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이 학교 상급생인 박만녕(朴萬寧)이 3월 9일부터 만세 운동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고, 3월 11일 전교생을 모아 방과 후 비안 장터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 일본인 교장의 연락을 받은 비안 주재소 경찰들이 만세 시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면서, 시위는 다음날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다음날인 3월 12일 등교 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은 오전 10시 30분 무렵 학교 뒤 언덕 위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2. 괴산동 만세 시위

3월 13일에는 안평면 괴산동에서 교회 신도들에 의해 준비된 만세 시위 운동에 쌍계동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이 만세 시위로 인해 시위자 1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박영화는 1년 6개월, 나머지 사람들은 10개월 내지 7개월의 형을 받았다.

3. 우곡 시장 만세 시위

3월 13일에 비안면 동부동과 서부동 주민 100여 명이 우곡 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고, 16일에 또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두 차례에 걸친 우곡 시장의 시위로 인해 22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중 김석근, 임재호, 박후도, 박홍섭 등은 징역 10개월, 다른 사람들은 6개월에서 2개월의 형을 받았다. 3월 16일 비안 장터 북서쪽에 위치한 이두동과 장춘동에서는 소년들이 중심이 되어 야간에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4. 안평면 만세 시위

안평면 대사동에서 교회 신도를 중심으로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만세 시위 운동이 벌어졌다. 교회의 간부들이 시위를 조직하고, 지역의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특히 3월 17일과 19일 시위에는 무려 4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와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35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이종출과 이옥돈은 1년 6개월, 이만준이배기는 1년, 나머지는 10개월에서 4개월의 형을 받았다.

5. 봉양면 만세 시위

봉양면 사고동에서는 3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지역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위로 인해 이복구, 이종광, 이종순 등 3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탄압을 받았고, 3명 모두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6. 금성면 만세 시위

3월 18일 의성 장터에서 금성면 대리동의 교회 간부들에 의해서 준비된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이 시위로 인해 주도자 12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박낙현은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윤영주·오상룡·윤용구는 징역 10개월, 나머지 사람들은 징역 8개월에서 6개월의 형을 받았다.

7. 봉양면 도리원 만세 시위

3월 19일 의성의 교통 요충지인 봉양면 도리원에서 1,000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시위대가 형성되어 도리원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가하자 시위대는 투석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의성군에서 유일하게 시위대와 진압 진영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 1명[권해운]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또 시위대 26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김유식·김도식·권사연 등은 징역 2년, 나머지는 징역 1년에서 6개월의 형을 받았다.

8. 점곡면 만세 시위

3월 19일 도리원의 유혈 진압이 있은 뒤 같은 날 밤 점곡면 주재소 앞에서 재차 만세 시위 군중을 향한 발포가 있었다. 이곳의 시위는 다음날인 3월 20일 밤에도 다시 진행되었다. 이 시위로 모두 2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9. 신평면 만세 시위

3월 25일 의성군 신평면 덕봉동과 중률동에서 지역의 기독교인 50여 명이 모여 점곡면 사무소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인 다음 주재소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시위 군중 12명이 일경에 붙잡혔고, 그중 8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모두 징역 4개월의 형을 받았다.

10. 춘산면 만세 시위

4월 초 춘산면 금오동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계획되었으나 시위를 준비하면서 격문을 돌리는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탄압을 받으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비록 시위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이 시위 계획이 의성 지역에서의 마지막 만세 운동이었다.

[결과]

의성 지역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사람 가운데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된 이들의 수는 148명에 달했다. 시위로 인해 주재소 한 곳이 파손되었고, 두 차례에 걸친 일제 관헌의 발포로 시위자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의의와 평가]

의성 지역의 만세 운동은 전 민족적 항일 운동인 3·1 운동을 더욱 강화시켰고, 이를 통해 임시 정부의 수립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나아가 공화정을 정착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의성군에서 일어났던 3·1 만세 운동은 일제 강점기 의성 독립 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움직임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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