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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69
한자 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신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치선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 846임지도보기
소재지 고성산성 터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30지도보기
소재지 금성산성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산7지도보기
소재지 비봉산성 터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산30-1지도보기
소재지 병방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38지도보기
소재지 상화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상화리 산45-1지도보기
소재지 삼산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삼산리 산22지도보기
소재지 화장산성 터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산145-1지도보기
소재지 봉양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 산77지도보기
소재지 금학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 산35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흙이나 돌로 축조한 전통 시대 방어 시설.

[문헌 사료에 보이는 의성의 산성]

의성 지역의 산성과 관련한 내용이 실린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 사료는 1454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의성현(義城縣)조에 금산석성(金山石城)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금산석성은 의성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둘레 1,516보로 높고 험준하며 성내의 네 곳에 샘이 있다. 그리고 군창이 있는데 군위현과 비안현의 군창을 아울러 받아 두었다[金山石城 在縣南十五里 周回一千五百十六步 高險 內有泉四 又有軍倉 軍威比安軍倉倂入置]”는 내용이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의성현의 성곽조(城郭條) 기록이 없으나, 고적조(古跡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읍성(邑城)은 토축으로 둘레가 4,720척이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邑城 土築周四千七百二十尺 今廢]”, “황산성(黃山城)이 현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서쪽 석축의 길이가 45척이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고 동·남·북쪽은 모두 절벽이다[黃山城 在縣東四十里 西面石築周四十五尺 今廢 東南北皆絶壁 ]”라고 하였다. 또한 앞의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금산석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금성산 고성(金城山 古城)이 있어, “금성산 고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9,100척에 높이 13척으로 높고 험준하며 성내에 샘이 네 곳 있다[金城山古城 石築周九千一百尺 高十三尺 高險 內有四泉]” 라고 하였다.

1832년경에 발간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의성현지(義城縣誌)에는 보다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앞의 금산 석성과 읍성, 황산성, 금성산 고성 외에도 마령산성(馬嶺山城)과 성산산성(城山山城)이 추가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읍성에 대한 기사[邑城 土築 周回四千七百二十尺 今廢]는 이전과 같으나, 황산성(黃山城)의 기록은 이전보다 훨씬 자세하다. 황산성에 대해 “현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속칭 성동(城洞)이라고도 하며 어느 시대에 축조했는지 알 수 없다. 동쪽으로부터 남쪽과 북쪽은 큰 산이 절벽을 이루지만 서쪽은 낮고 미미하여 마치 병목과 같은 형상인데, 그 위에 둘레가 45척 되는 돌을 쌓아 막아 견고하기가 만 명의 장부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성 내의 공간은 동서로 7~8리, 남북으로 거의 5리가 되며, 그 가운데 땅심이 깊고 평평하여 농사가 가능한 곳도 있고, 동쪽 산기슭에는 궁궐터가 있는데 석축이 기울어지고 무너져 있다[在縣東四十里 俗名城洞 不知築於何代 而東南北大山絶壁 西面低微如甁項 石築其上 周回四十五尺 防守之固眞萬夫莫開者也 城內東西七八里 南北僅五里許 其中平行土厚可耕 東山麓有宮基石築頹圮]”고 하여 구체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금성산 고성에 대해서도 “금성산 고성은 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석축성이며 둘레가 9,100척, 높이가 13척으로 매우 높고 험준하다. 성내에는 샘이 4곳 있으며 또한 대궐터가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金城山古城 在縣南二十五里 石築 周回九千一百尺 高十三尺 極高險 內有四泉 又有大闕遺址 今廢]”고 하여, 대체로 이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술에 성의 위치와 대궐터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이전 기록에는 보이지 않았던 마령산성과 성산산성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마령산성은 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전해오는 말로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할 때 이 성을 쌓았다고 하며, 둘레는 3리이고 성내에는 우물터가 완연하게 남아 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馬嶺山城 在縣北三十里 世傳高麗恭愍王避紅巾賊築是城 周回三里 內有井基宛然 今廢]”라고 기록하고 있고, “성산산성은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만력 정유년(1597)에 명나라 군대가 왜를 정벌하고자 와서 수년간 주둔하면서 유격 대장 엽사충(葉思忠)이 의성현의 진영에 머물면서 성산에 토성을 축조한 것으로서, 둘레가 4~6리 정도로 그 터가 늘 있었는데, 지금의 봉수터이다[城山山城 在縣南五里 萬曆丁酉天兵爲征倭來屯守數年 遊擊葉思忠留陣本縣 築土城於城山 周回四五六里 基地尙存 今烽燧地也]”라고 하였다.

1871년 간행된 『영남읍지(嶺南邑誌)』의 의성현지에서도 『경상도읍지』와 동일한 내용의 성곽 관련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1864년경에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읍성에 대해 “읍성은 흙을 쌓은 것으로 둘레가 4,720척이다[邑城 土築周四千七百二十尺]”라고 하여 소략하게 기술한 반면, 저자인 김정호(金正浩)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다음과 같은 기사도 나타나고 있다. “금학산 고성은 금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둘레가 9,100척으로 높고 험준하며 샘이 4곳이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에 축조한 조문성이 이것이다[金鶴山古城 一云金城 周九千一百尺 高險 有四泉 新羅文武王十三年築召文城者是]”라고 하여, 이전 기록의 금산석성, 금성산 고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계 고현성은 동쪽 40리에 있는데 황산성이라 칭하며 동남북이 절벽에 가깝고 서쪽만 석축을 하였는데 둘레가 145척이다[日谿古縣城 東四十里 称黃山城 東南北絶壁准 西面石築一百四十五尺]”라고 하여, 일계 고현성이 이전 기록의 황산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만 황산성에 대한 이전 기록에는 모두 서쪽 성벽의 둘레가 45척이라 했으나 여기서는 145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김정호의 착오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성은 서쪽 5리에 있으며 선조 30년 명나라 군대가 왜군을 정벌할 때 옛 성터를 개축하여, 이곳에 머물렀으며 둘레는 5리가 넘고 지금 그 터가 남아 있다[古城 西五里 宣祖三十年 天將征倭時 因古址改築屯于此 周五里餘 今有遺址]”는 내용으로 보아, 고성이 『경상도읍지』와 『영남읍지』에 기록된 성산산성을 지칭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구 고현성은 마령성이라고도 부르며 북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3리로서 신라 소지왕 7년에 축조한 구화성이 바로 이것이다[高邱古縣城 一云馬嶺城 北三十里 周三里 新羅炤知王七年築仇火城者是]”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의성 지역의 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 대부분이 늦어도 조선 초에는 축성되었으며 일부는 조선 말까지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산성의 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의성의 산성 유적 현황]

2012년 현재까지 밝혀진 의성 지역의 산성 유적은 병방리 산성터, 상화리 산성터, 삼산리 산성터, 산제리 화장산 성터, 봉양리 산성터, 금학리 산성터, 치선리 산성터, 팔성리 고성산성 터, 조문성으로 비정되는 수정리 금성산성, 봉정리 비봉산성 터 등 모두 10개소이다. 이 가운데 상화리 계란산 봉수터,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치선리 봉수터,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등은 산성 내에 함께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산성은 높이 210~370m 사이에 위치하고 있지만, 의성군의 최동단에 있는 금학리 산성터의 경우 782m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최서단의 봉정리 비봉산성 터가 579m, 최남단의 수정리 금성산성이 531m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산성의 규모는 대체로 길이나 둘레가 1㎞ 이하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화리 산성터는 2㎞, 봉양리 산성터는 2.5㎞에 이르며 수정리 금성산성의 경우 무려 4㎞에 달하여 큰 차이를 보인다. 성벽의 높이에 있어서도 산성으로 기능할 당시의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원형을 잃은 상태이다. 치선리 산성터병방리 산성터는 일부 구간의 성벽 높이가 3~6m정도로 비교적 잘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외 대부분 산성은 1m 내외의 높이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밖에도 산성 내에 건물지와 우물터, 망루 및 봉수 등 각종 시설과 관련된 유구가 양호하게 잔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흔적만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대부분 지표 조사에 의해 밝혀진 것이며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의한 것은 아니다. 향후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을 위해서 보다 정밀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산성 유적 대부분이 사유지로서 숲이 우거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며,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는 유적은 없다.

[의성의 산성 유적이 갖는 의의]

의성 지역의 지형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형태인데, 산성의 분포는 의외로 남북으로 조밀한 편이다. 의성읍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단촌면상화리 산성터병방리 산성터가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의성읍치선리 산성터팔성리 고성산성 터, 금성면수정리 금성산성 및 봉양면삼산리 산성터 등이 위치한다. 그러나 의성읍의 동쪽으로는 옥산면금학리 산성터만 있고, 서쪽으로도 비안면산제리 화장산성 터안계면봉양리 산성터, 다인면봉정리 비봉산성 터가 있지만 먼 거리를 두고 드물게 배치된 양상이다.

이와 같은 의성의 산성 분포 현황은 지형적인 측면이 작용한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선(戰線)이 남북을 축으로 하여 동서로 형성되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의성 지역은 영남 내륙 지역으로서 군사적 전략상 적의 저지선을 촘촘하게 구축할 필요가 컸을 것으로 분석된다. 영남 내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의성 지역의 산성들은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에 따라 축조되었고 유사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문헌 기록에 전하는 고려 시대 공민왕 때의 홍건적 침입 관련 기사나 정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의 관련 기사 등을 통해서, 의성 지역의 산성이 갖는 국방상의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의성 지역을 중요 거점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간 신라의 성장과 관련해 볼 때에도, 의성 지역 산성의 기능과 역할이 매우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12.20 [의성의 산성 유적 현황] 수정 <변경 전>금성산성이 530m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변경 후>금성산성이 531m로 그 뒤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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