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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49
한자 義城戰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류영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929년 7월연표보기 - 후백제 공격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홍술|견훤|왕건

[정의]

929년 의성 지역에서 벌어진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전투.

[개설]

후삼국 정립기인 929년 7월 후백제가 의성 지역을 공격하였다. 전쟁 중에 의성 지역을 지키던 성주 홍술이 전사하고 의성은 함락되었다. 후백제는 이 의성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달에 지금의 풍산 지역인 순주(順州)를 함락하고, 10월에는 지금의 문경 지역인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과 가은현(加恩縣)을 공격하는 등 929년 말에서 다음해 초까지 이어진 안동의 고창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경상도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역사적 배경]

후백제는 927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함락하고 이어서 왕건이 이끈 고려의 정병을 대구 팔공산 지역에서 격파한 후, 경상도 지역에서의 세력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929년에 이르러 왕건이 지금의 풍기 지역인 기주(基州)를 순행하는 등 여전히 경상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자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경상도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의 입장에서 경상도로의 진출로는 죽령과 추풍령, 그리고 계립령 및 이와 인접한 조령이었는데, 이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한 의성 지역의 확보가 관건이었다.

[경과]

의성 전투 에 관한 기본 역사 자료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기이편 견훤조, 『고려사』 세가,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삼국 시기를 연구하는 가장 기본 되는 역사책에 의성 전투가 기록되고 있다는 것은 곧 이 의성 전투가 지닌 의미의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견훤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장군 홍술이 전사하였다는’ 정도로 지나치게 소략하여 당시 의성 전투의 세밀한 상황을 재구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견훤이 동원한 병력이 ‘갑졸 5,000’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홍술의 전사에 대해서 왕건이 “나의 좌우수(左右手)를 잃었다”고 애통해 하는 표현을 남김으로서 의성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과 홍술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느끼게 하는 정도의 부가적 서술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후대 자료에서 그 편린을 챙겨볼 수밖에 없는데, 우선 조선 후기에 세우진 홍술의 순절비인 「고려 김장군 순절비(高麗 金將軍 殉節碑)」를 지은 김이곤(金履坤)[1712~1774]은 비문에서 의성현의 구성산(九成山)이 둔산(屯山)으로 그 산 아래서 홍술이 전사하였다는 고을 선비의 얘기를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구성산이나 둔산이란 표현이 보이지 않으며,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의성읍지』에 둔덕산(屯德山)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 산은 현재 의성읍 상리리·중리리를 남북으로 인접하고 있는 산이며, 산 남쪽 사당골에 홍술 장군의 사당과 순절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의성 군민들은 이곳을 의성 전투의 격전지이자 홍술의 순절 터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의성읍지』에서는 ‘세전(世傳)’을 전제로 홍술의 용모가 태조와 닮아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는 의성 전투 2년 전인 927년 대구의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속전(俗傳)’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순절비문’에 담긴 김이곤의 견해는 『고려사』에 왕이 군중(軍中)에 있었다는 표현이 없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의성읍지』의 표현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의성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충절에 감복하고 그를 위하여 사당을 세우기까지 하였음을 전제로 『고려사』는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니 고을 사람들의 기록인 『의성읍지』만 못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즉 왕건과 용모의 유사성을 홍술의 순절 원인으로 보는 『의성읍지』의 기록을 신뢰하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결과]

견훤의 침공을 받은 의성 지역은 성주 홍술과 지역 주민의 분전과 희생 속에 함락되고 말았으며, 견훤의 후백제군은 경상도 북부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어 같은 달에 안동에 인접한 순주(順州)[현 풍산 지역]마저 함락하였으며, 10월에는 지금의 문경 지역인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과 가은현(加恩縣)을 공격하게 되었다. 비록 가은현의 공격이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한해 전인 928년 11월 오어곡(烏於谷) 확보를 통한 추풍령로의 차단과 문경으로 이어지는 조령로 및 인접한 계립령로의 차단으로 이제 고려의 경상도 진출로는 동쪽으로 훨씬 우회하는 죽령로만 남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929년 말에서 930년 초에 걸친 안동의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후백제가 차지한 후삼국 운영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게 되었지만, 죽령로를 넘어 안동 지역에 오기까지 고려의 입장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 왕건 스스로가 여기서 지면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고 비장한 심정을 토로할 정도였던 것이다. 즉, 죽령로 마저 막혀버리면 고려의 경상도 진출은 거의 불가능해지는 상황이었으며, 공산 전투 패배 이후 열세의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끌고 죽령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된 상황의 근저에는 바로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 의성 지역이 후백제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가능했던 현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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