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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39
한자 召文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형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85년 2월연표보기 - 조문국이 멸망하고 조문군을 설치
관할 지역 조문군 - 경상북도 의성군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설치된 신라 시대 행정 구역.

[개설]

사로국은 벌휴왕 2년(185) 2월에 의성 지역 조문국을 정벌하면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조문국을 정벌한 후, 신라는 이 지역을 조문군으로 삼아 소백산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서 활용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는 한 국가를 병합한 뒤 그 국명을 지방 행정명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경상남도 김해의 금관가야나 경상북도 고령의 대가야의 예를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의성 지역에 위치한 조문국은 신라에 병합된 뒤 조문군으로 편제되었다. 673년(문무왕 13) 9월에 조문성을 쌓았는데 이 이름은 당시 조문군의 명칭에서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문군의 군치가 이곳이었음을 알려 준다. 1864년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조문국이 멸망하고 조문군이 되었다"고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본기를 보면 의성 지역 조문국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뒤 조문군으로 편제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벌휴왕 2년(185)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 군주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二月拜波珍湌仇道 一吉湌仇須兮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 始於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1864년 김정호의 『대동지지』 의성 연혁조에도 조문국이 멸망하여 조문군이 되었다고 전한다. 경덕왕 16년에 문소군으로 바꾸고 상주에 예속시켰다.[本召文國 新羅伐休王二年滅之 置召文郡 景德王十六年改聞韶郡隸尙州]”고 하였다.

[내용]

조문국이 위치하였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는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즉 소백산맥 안팎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 경상북도 경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절대 요충지였다. 신라는 이에 따라 의성 지역에 대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고,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문국을 정벌하였다. 신라는 이 지역을 조문군으로 명칭을 바꾸었을 것이다. 신라는 김해의 금관가야이나 고령의 대가야의 예를 통해 볼 때 한 나라를 병합한 뒤, 그 국명을 지방 행정명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신라는 이 지역을 장악하여 조문군으로 삼으면서 일단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고, 북방에서 정치변동 등의 이유로 이곳으로 남하하여 내려오는 유이민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조문성이 축성되었다는 것은 이곳이 곧 조문군의 군치로서 당시 이 지역의 중심지임을 알려 준다.

[변천]

조문군은 757년(경덕왕 16)에 진보현(眞寶縣)[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비옥현(比屋縣)[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안현현(安賢縣)[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단밀현(單密縣)[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의 4개 현을 속현으로 가진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내용)
ㅇ 조문성이 축성되었다는 이곳이 곧 조문군의 군치로서 당시
이 지역의 중심지임을 알려 준다.
- 이 부분은 윗글과 중복이 됩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8.06
김** (관련기록)
의성 연혁조에서도 조문국이 멸망하여 조문군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조문국이 멸망하고 조문군이 되었다
- 의성 연혁조에도 조문국이 멸망하여 조문군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로
수정함 적정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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