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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032
한자 宗敎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창환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통해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일체의 행위.

[불교]

의성 지역에는 현재 1000년 이상 된 전통 사찰이 9개소나 된다. 이는 신라나 고려 시대에 이미 의성에서 불교가 매우 성행했음을 말해 준다. 이처럼 일찍부터 의성에서 불교가 성행하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은 의상 대사이다. 그가 의성에 건립했거나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만 6곳으로 수정사(水淨寺), 옥련사(玉蓮寺), 고운사(孤雲寺), 주월사(住月寺), 운람사(雲嵐寺), 지장사(地藏寺) 등이다. 그 밖에 고찰로는 신라 시대 804년(애장왕 5)에 심지 대사(心地 大師)가 창건한 정수사(淨水寺),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대곡사(大谷寺), 통일 신라 시대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만장사(卍長寺), 통일 신라 후기인 9세기 때의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선암사지(仙岩寺址) 등이 있다.

비록 사찰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의성의 융성했던 불교를 알리는 유적들 또한 적지 않다. 7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모전 석탑인 국보 제77호 의성 탑리 오층 석탑,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모전 석탑인 보물 제327호 빙산사지 오층 석탑과 이곳에서 발견되어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 사리 장치,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인 보물 제188호 의성 관덕동 삼층 석탑,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물 제246호로 지정된 의성 고운사 석조 여래 좌상 등 의성에는 많은 불상과 석탑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배불 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성 지역의 전통 사찰에는 중수나 중창이 꾸준히 이루어진 것을 보면 당시에도 불교가 종교로서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현재 의성에 소재하고 있는 사찰은 46개소이고, 전통 사찰은 9개소로 정수사, 수정사, 대곡사, 고운사, 만장사, 주월사, 지장사, 옥련사, 운람사 등이 있다. 이 사찰들은 근래에도 꾸준히 중창, 보수 작업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의성에서는 사찰의 수뿐만 아니라 신도 수 역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유교]

『의성현지(義城縣誌)』에는 1200년 전인 문소군(聞韶郡) 초기에 공자묘(孔子廟)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 의성 출신인 박성양(朴成陽)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이학(理學)을 강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면 의성에는 유교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래되었고, 비록 소수의 사람에게서나마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의성에서 유교의 보급이 일반에게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의성은 지역적으로 안동에 인접하여 있어 자연히 퇴계의 학맥과 연결되었다. 신원록(申元祿)과 같은 퇴계의 직제자를 비롯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처럼 퇴계의 학맥을 통해 그 토대를 다져온 의성의 유교는 18세기 중엽에 임필대(任必大)라는 뛰어난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10세에 이미 사서(四書)에 능통하였고, 이후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학서를 탐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1749년 경상도 관찰사 민백상(閔百祥)임필대의 학행에 감명을 받아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만년에 임필대의 학풍(學風)을 흠모하여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많아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의성의 유교는 임필대로부터 크게 진작이 되었으나 여전히 퇴계 학맥과 연계는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정(李象靖), 정종로(鄭宗魯), 유치명(柳致明),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의성 출신의 문인들이 꾸준히 배출되었다.

의성 지역에 남아 있는 유교 유적으로는 먼저 의성 향교(義城 鄕校)비안 향교(比安 鄕校) 등 서원을 비롯해 10곳의 서원이 있다. 그리고 사직단, 성황단, 여단을 비롯한 21곳의 사우(祠宇), 금운정을 비롯한 57곳의 정자(亭子), 모선재를 비롯한 76곳의 재사(齋舍), 효사당을 비롯한 22곳의 당우(堂宇), 만동 서숙을 비롯한 8곳의 서당(書堂)이 있다. 이 많은 유적들을 보면 의성 지역에서 유교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유교와 관련된 활동의 대부분은 의성 향교비안 향교, 그에 소속된 유도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세태의 변화로 인해 과거처럼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천주교]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상도로 유배된 56명 가운데 강성철(姜成喆)이 바로 의성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와 비슷한 시기에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쌍호에는 서울에서 천주교를 믿다가 박해를 받아 이곳으로 피신해온 박수광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깊숙한 오지이면서도 경상북도 예천이나 경상북도 안동과 인접해 있어 한편으로는 은밀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옹기를 구워 팔아 생활을 영위하기에 용이한 곳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이곳에는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박해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점차 뿌리를 내린 의성의 천주교는 1891년 경상도 지방의 공소를 순회하던 김보록 신부가 쌍호의 교우촌에서 최초로 성사를 집전하였으며, 1893년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가 다시 이곳에서 견진 성사를 주었을 때는 그 신도가 12가구 50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사라지면서 신도의 수는 더욱 늘어나 1934년 8칸의 신축 공소를 건립함으로써 의성에서의 천주교는 완전한 정착을 보게 되었다.

의성에서 천주교의 교세가 급작스레 확장된 것은 6·25 전쟁 직후였다. 그것은 성당에서 미국 가톨릭 구제회[NCWC]의 구호 물자를 천주교회에서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 성당의 세례자가 50명이 넘고 예비자는 200명이나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의성 지역에는 의성 공소·다인 공소·안계 공소가 생겨나고, 이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모두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의 공업화 정책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의 경제난과 이농 현상이 가속화되자 의성의 천주교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천주교에서는 사목의 방향을 농민 사목으로 정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정부의 반농민적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그리고 격동의 1980년대가 지나자 의성 천주교의 사목 방향도 서서히 바뀌어 나갔다.

그동안 투쟁 일변도였던 농민 운동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도시와 농촌 간의 연결을 통한 우리 농산물의 직거래로 생산자인 농민과 소비자인 도시인 모두를 보호하고, 유기 농법을 통해 무공해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삶을 밝게 하는 운동으로 변모하였다. 또한 성당 내부에서는 어린이집이나 문화원과 같이 시설들을 건립하여 성당이 지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2012년 현재 의성군에는 의성 성당, 다인 성당, 안계 성당 등 3곳의 성당과 그 산하에 6곳의 공소가 있으며, 신도의 수는 약 3,200명이다. 그 동안 농촌 인구의 고령화로 교세가 위축되어 왔으나 최근에 다행스러운 일은 귀농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조금씩이나마 신도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

[개신교]

의성의 개신교는 1893년 경상북도 전역을 순회하며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어드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김수영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수영은 방위양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뒤 1900년 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1902년 의성 최초의 교회인 비봉 교회가 설립되었고, 이후 신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금성면 제오 교회, 춘산면 효선 교회, 봉양면 삼산 교회 등이 분립하였다. 한편 1903년 경상북도 군위의 봉황 교회로부터 분립한 의성군 비안면 쌍계 교회는 교세가 확장되면서 신평면 덕봉 교회, 안평면 대사 교회, 봉양면 도리원 교회 등이 분립하였다. 이러한 교회들이 의성에서 개신교의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1910년대 중반까지 순조롭게 성장한 의성의 개신교는 1919년 평안남도 평양과 대구의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의 만세 시위에 100여 명이 동참하였고, 3월 15일부터 닷새 동안 안평면 대사 교회에서 벌였으며, 3월 19일 700여 명이 모인 봉양면 도리원의 대규모 시위에서는 일제의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만세 시위 이후 많은 개신교인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순교하거나 만주로 피신하기까지 하였다.

1930년대에 들면서 일제의 개신교 탄압은 가속화되어 신사 참배의 강요, 찬송가와 기도문의 검열, 농우회의 탄압 등으로 이어졌다. 1940년대에는 1면 1교회 정책에 따라 많은 교회들이 통폐합되었다. 1950년대에는 전쟁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미국 교회의 도움으로 복구되면서 이후 꾸준한 성장을 이루었다.

2012년 현재 의성에는 160여 곳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 농촌 인구의 급감과 고령화로 인해 과거에 비해 교세가 다소 약화된 추세이다. 그러나 160곳이 넘는 교회의 숫자나 창립된 지 100년이 넘는 교회가 20여 곳이라는 것은 의성에서 개신교의 뿌리와 기반이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를 보여 준다.

[신종교]

신종교가 의성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부터이다. 1954년 성덕도가 포교를 시작한 이후 통일교, SGI[국제 창가 학회], 원불교가 차례로 자리를 잡고, 가장 최근에 들어온 신종교가 1991년의 여호와의 증인이다.

성덕도는 1954년 의성읍 도동리에 교화원을 설립한 이후 1970년에는 안평면 창길리에 창길 교화원을, 그리고 1986년에는 신평면 교화리에 신평 교화원을 설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통일교는 1958년부터 개척을 시작하여 1963년 의성읍 후죽리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2008년을 기준으로 의성 지역에서만 100여 쌍이 국제 합동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활발한 전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원불교는 1978년 1월 6일 선교소 설립 인가를 받고 월 1회 출장 법회를 열다가, 1979년 3월 초대 교무가 부임하였으며, 1983년 의성읍 중리리에 교당을 신축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왕국 회관을 1984년 의성읍 상리리에 설립하고, 가정 성서 연구와 같은 활동을 통해 포교를 하고 있다. 1971년 3월 일반 가정집에서 좌담회를 열면서 포교 활동을 시작한 SGI는 1991년 4월에는 의성읍 중리리에 한국 SGI 의성 문화 회관을 세웠으며 현재는 500여 명의 신도가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위에 기재된 유교유적의 개소수와 본 사이트 유교항목에 소개된 유적별 건수, 의성군지(P464~)의 건수가 다릅니다.
확인해 주세요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에 대하여 의성군지와 대조, 확인 후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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