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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014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개설]

우리 민족은 개항 이래 근대를 달성하기 위한 자구적 노력을 경주하면서 외세의 침탈을 막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강제적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의 한국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일제의 한국 지배에 맞서 국내외에서 적극적·지속적인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침탈에 맞서 을미의병부터 시작되어 정미의병 투쟁까지 전개되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 이후 비밀 결사를 통한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전 민족적 항일 운동인 3·1 운동이 국내외에서 크게 일어나자 의성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만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연이어 상해임시정부의 수립, 유림 세력의 독립 청원 운동인 파리장서 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일제가 3·1 운동을 계기로 한국 지배 정책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꾼 뒤 의성 지역에서는 전국의 흐름에 맞추어 농민·청년·형평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의성 지역에서는 1930년대 일제가 1920년대 말 세계 공황 이후 만주 침략을 일으키고,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점차 본격화할 때, 이에 맞서 적색독서회, 적색농민조합 운동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의성의 독립운동은 전국적인 흐름에 적극 동참하면서도, 의성 지역의 특징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러한 의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일제 패망 이후 근대 민족 국가의 수립을 기대케 하였다.

[의병 항쟁의 발생과 전개]

의병 항쟁은 집권층이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서 외세가 침략하여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 형태였고,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더 나아가 의병 항쟁은 일제의 한국 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여 민족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의병 항쟁의 전개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을미의병[1895~1896]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을사의병[1905~1907]은 강제적 을사조약 체결이, 정미의병[1907~1910]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주요 배경이 되었다. 특히, 정미의병의 경우 해산 군인이 의병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의병 항쟁은 전쟁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교육 진흥과 산업 발달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여 자강을 이루어냄으로써 국권을 수호하여 근대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계몽 운동이 펼쳐졌다. 계몽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준비론적인 실력 양성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에 맞선 우리 민족의 노력은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이라는 두 흐름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였다.

의성 지역의 의병 항쟁은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를 보면, 의병장에 김상종(金象鍾), 초모장에 김수욱(金壽旭), 중군에 권대직(權大稷), 선봉장에 김수빙(金壽聘), 관향장에 김수협(金壽莢) 등이었다. 이들은 점곡면의 유생들로 1895년에 민비[후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 소식을 들은 후 궐기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에 밀려 황산(黃山)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여기에서 의병진은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빙, 김수협 등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梧上里) 출신의 이필곤(李苾坤)은 1896년 2월 일본의 침략에 분개해 향내 청장년에게 통문을 돌려 창의를 주창하였다. 그 뒤 의병 진영을 갖추고 춘산면의 사미(思美)와 옥산의 황산(黃山)에서 적과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을 못 이긴 조선 왕실은 파병의 조칙을 내리게 되자 비통함을 품은 채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이필곤 의병장은 1907년 7월 3일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었고, 마침내 일본군 안동 수비대에 의해 총살을 당하였다.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孝仙里) 출신 박연백(朴淵伯) 의병장은 1906년 팔공산에서 기병하였다. 의병 부대의 규모는 약 300명 정도로, 의성·금성·의흥·신녕·영천·영일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산남 의진의 입암(立岩) 전투에 참가했다가 많은 의병이 희생되었다. 그 뒤 1909년 12월 무렵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일제의 침탈과 의성 독립운동의 배경]

일제의 한국 침탈과 지배는 통감부와 조선 총독부의 설치로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총리대신을 거쳐 천황에 상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위임된 범위 내에서 육해군의 통솔권과 제반 정무에 대한 통할권 등을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에게는 제령(制令)이라고 하는 입법권이 주어졌다. 조선총독에는 육군이나 해군의 대장만이 임명되게 했다. 따라서 조선총독은 식민 지배의 최고 권력자였다.

조선 총독부는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 등의 행정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경제 침탈 기구로서 철도국·통신국·세관국·임시 토지 조사국 등의 기구를 두었다.

일제는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제국주의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이런 원칙은 조선 통치의 최고 방침에서 제시되었는데, 이 방침의 핵심은 ‘조선 통치의 근본 방침은 내선일체화이고, 궁극적 목표는 조선의 시코쿠·규슈화이다’라는 철저한 동화주의 정책이었다.

일제 강점기 의성 지역을 보면,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비안군의 1개 면을 제외한 전부와 용궁군의 1개 면을 합해 의성군을 만들고 군수를 두었다. 이때 의성군의 행정 구역은 18면, 182개 동이며, 호수와 인구는 2만 1358호, 13만 4680명이다. 의성 군수는 일본인으로 임명하고, 면장은 대부분 조선인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의성 지역의 지배를 위해 의성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의성경찰서가 설치되기 전까지를 보면, 먼저 1906년 10월 경무고문 안동분견소 의성분파소가 설치되어 옛 의성군 일원을 관할하였다. 1907년 1월 관제 개혁에 따라 안동경무서 의성분파소로 개칭되고, 다시 1908년 7월 안동경찰서 의성순사주재소로 바뀌었다. 1909년 11월에 이르러 의성경찰서로 승격되었고, 옛 의성군 외에 비안군·군위군·의흥군 등 3개 군을 관할하였다. 그러다 1910년 7월 의성경찰서는 의성군 일원, 비안군의 40개 면 및 안동군의 2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4년 의성군·비안군 등 2개 군이 의성군으로 통합되어, 의성경찰서는 의성군 전체를 관할하게 되었고, 16개의 주재소를 설치하였다. 의성경찰서의 직원은 1930년대 중반에는 80여 명에 달했다.

의성 지역의 산업은 주로 농업이 중심이었다. 농산물은 미곡·맥·대두 등이었으며 면작은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생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의성 지역의 주요 경제 기관을 보면, 의성금융조합, 안계금융조합, 귀천금융조합, 도리원금융조합 등 4개 금융조합이 운영되었다. 1928년에 의성주조주식회사가 조선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1929년에 의성국자조합이 설립·운영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1930년대 중반 무렵 공립 소학교 2개 교[의성, 안계], 공립 보통학교 10개 교 등이 운영되고 있었고, 학생 수는 2,900명 정도였다. 경찰관서 수보다 적은 학교로는 13만 인구의 의성의 교육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는 정도였고, 동시에 중등학교는 단 1곳도 설립되지 않았다.

그 밖에 주요 관공서는 의성군청, 대구지방법원 의성출장소, 안계우편소, 면사무소 18개 등이 있었다. 의성군의 주요 공직자를 민족별로 보면, 면장을 제외한 주요 기관의 기관장 및 의원 등은 대부분 일본인이 독점하는 형세였다. 이처럼 한말·일제 강점기 의성군은 강고한 일제의 지배 구조 속에 위치해 있었고, 동시에 식민지 지주제 속에서 지주와 소작인 간의 불평등한 관계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모순 구조는 의성군에서 민족 독립 투쟁이 발생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910년대 국권 회복 운동과 3·1 운동]

1910년대 일제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무단 통치는 한국인의 최소한의 정치적인 자유나 인권이 인정되지 않는 폭압적인 정치 지배 구조의 성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민족 운동의 전개가 어려운 고국을 떠나 국외로 망명을 떠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를 통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국권 회복 운동의 역량 위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린 가운데서 민족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 세계사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발생한 러시아 혁명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제창에 일정한 영향을 받아 일어난 민족 독립운동이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국내외로 번져나갔다.

의성 지역의 3·1 운동은 3월 12일부터 4월 초순까지 군내 12곳에서 열아홉 차례에 걸쳐 시위가 벌어졌다. 의성 지역의 첫 시위는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이 학교 상급생인 박만녕(朴萬寧)이 3월 9일부터 만세 운동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고, 3월 11일 전교생을 모아 방과 후 비안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하였다. 다음날인 3월 12일 등교 후 비안 공립 보통학교들은 오전 10시 30분 무렵 학교 뒤 언덕 위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다. 3월 13일에는 안평면 괴산동 교회의 신도들에 의해 준비된 만세 운동에 쌍계동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이 만세 운동으로 인해 시위자 1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중 박영화는 1년 6개월, 나머지는 10개월 내지 7개월의 형을 받았다. 같은 날 비안면 동부동과 서부동 주민 100여 명이 우곡 시장에서 만세 운동운동이 일어났다. 3월 16일 또 다시 같은 장소인 우곡 시장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같은 날 비안 장터의 북서쪽에 위치한 이두동과 장춘동에서 소년들이 중심이 되어 야간에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안평면 대사동 교회 신도를 중심으로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이 가운데 3월 17일과 19일 시위에는 무려 4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과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35명에 이르렀다.

봉양면 사부동에서 3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지역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의성 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3월 18일 의성 장터에서 금성면 대리동 교회의 간부들에 의해 준비된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3월 19일 의성의 교통요충지인 봉양면 도리원에서는 1,000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시위대가 형성되어 도리원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가하자 시위대를 투석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의성 지역에서 유일하게 시위대와 진압 진영이 충돌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가 사망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3월 20일 밤 점곡면주재소 앞에서 재차 만세 운동 군중을 향한 발포가 있었으며, 다음 날 밤에도 다시 벌어졌다. 3월 25일 의성군 신평면 덕봉동·중율동 등에서는 지역의 기독교인 50여 명이 모여 점곡면사무소 앞에서 만세 운동을 벌인 다음 주재소로 갔다. 4월 초 춘산면 금오동에서도 만세 운동은 사전에 격문이 발각되는 까닭에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다.

의성 지역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사람 가운데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148명에 달했다. 시위로 인해 주재소 한 곳이 파손되었고, 두 차례에 걸친 일제 관헌의 발포로 시위자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3·1 운동 을 계기로 대중의 사회적 진출은 크게 증가하였고,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분출하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 대중은 억압을 받으면서도 사회 변화에 일익을 담당하는 사회 세력으로 성장 전환해 나갔다.

[1920년대 이후 의성의 독립운동]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방향에서 펼쳐졌다. 1920년대 이후 3·1 운동을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농민·청년·여성 등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대중의 사회 진출이 크게 신장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물산 장려 운동과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대 전반기 민족 운동이 이념과 노선에 다라 다양한 분화를 겪는 가운데 민족 운동 진영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면서 민족 단일당으로 1927년에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1930년대 이후 세계 대공황의 여파와 일제의 파시즘 체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조선의 민족 운동은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이라는 흐름과 공산당 재건 운동, 적색 노동자·농민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외에서는 민족 연합 전선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항일 무장 투쟁이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국내외의 항일 민족 운동 세력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여 민족 독립에 대한 준비와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방략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성 지역에서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의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한일 병합을 기점으로 병합 이전에는 크게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고, 병합 이후에는 국내외 무장 투쟁과 연계한 독립운동, 3·1 운동, 농민·청년 운동, 형평 운동 등 대중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3·1 운동이 일어난 뒤 의성 지역 유림계는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불법성을 알려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의성 지역 대중 운동은 청년 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3·1 운동 직후 이미 의성 청년회가 결성되어 지역 차원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뒤 소남 청년회, 을축 청년회, 의성 불교 청년회, 산운 용남 청년회, 의성 소년단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 청년 단체들은 야학회 운영을 통해 교육 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지역 현안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경상북도 중앙에 위치하면서 내륙 평야의 농업 지대를 갖고 있었던 안평면에서 안평농민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한재 발생에 따른 소작농의 부담을 개선할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점차 조선의 농업 구조에서 소작농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 8월 의성 형평분사가 창립되어 150여 명을 회원을 확보하였다. 형평사는 조선 시대 차별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실질적인 평등한 사회를 이루려는 백정의 사회 운동 기관이었다. 또한 1925년 의성군 가음면에서는 가음 면장 신재봉(申載鳳)을 불신임 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의 강고한 통치 아래에서도 의성 지역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가 왕성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1930년대 의성읍에서는 적색 독서회, 안계면을 중심으로 인근 면을 대상으로 한 안계 적색 농민 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국내외 운동 세력의 연계를 위한 독립운동 자금 모집 운동과 상해 임시 정부 지원 활동 등이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강제 병합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결 투쟁이 일찍 전개되었다. 또 의성 지역 출신으로 대구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의 학생 운동도 두드러졌다. 김영소·이규남·박태식은 대구 고등 보통학교 학생 운동에, 박효준·이무영·윤영석은 대구 사범학교 다혁당에, 이원현은 대구 상업학교 태극단에, 신두수는 안동 농림학교 학생 운동을 펼친 까닭에 일제에 탄압을 받았다. 또 의성군 유재기를 중심으로 한 농우회 사건과 의성읍 교회가 주도한 신사 참배 거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에 징병당한 의성 출신 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귀순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의성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찬란한 오천년 역사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 실천 활동이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 이래 자본주의의 맹아를 싹 틔우면서 실학파에 의한 근대 전망과 민중들의 사회적 진출이 점차 활발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그 연장선상에서 독립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의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국권 회복과 독립을 쟁취하여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독립을 통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다. 더욱이 의병 항쟁에서 비롯된 의성 지역 독립운동은 1910년대 3·1 운동 시기 약 20여 차례에 걸친 만세 독립운동으로 절정을 이루어 상해 임시 정부의 건립에 일정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어 유림 세력의 독립 청원 운동, 곧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하고, 국외 무장 투쟁 세력과 연계한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대 이후 다양한 대중 운동과 독서회·농민 조합 등 비합법 투쟁, 신사 참배 거부 운동 등 일제 말기 황국 신민화 정책에 저항하는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의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경상북도 지역 독립운동 역량 강화에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고장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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