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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가로숲[서림, 가리쑤]의 전설-마을의 형성과 풍수 비보 사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005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호동

[개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 가로숲은 일명 서림(西林)이라고 한다. 사촌 마을 서편 들판을 가로질러 조성된 약 1,000m 길이의 방풍림인 사촌 가로숲은 김자첨이 14세기 말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 비보 사상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숲은 1999년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되었다.

[3정승이 나올 수 있는 명당 마을 사촌]

사촌 가로숲사촌 마을 서쪽에 조성한 숲이다. 사촌 마을안동 김씨(安東 金氏) 중시조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 金方慶)의 5세손 감목관(監牧官) 김자첨(金子瞻)[1369~1454]이 조선 개국의 해에 해당하는 1392년 안동의 회곡(檜谷)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마을을 개척하여 사촌이라고 하였다. 사촌(沙村: 모래골)이라는 이름도 김자첨이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떠 ‘사촌(沙村)’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는 이야기와 모래땅이던 지역적 특징을 감안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찍이 지사(地士)들은 사촌 마을을 영남(嶺南) 8명기(名基) 중의 하나라 하여 세 정승이 나올 수 있는 명당자리라고 하였다. 신라 말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의 장인으로 정승을 지내고 안정백(安貞伯)에 봉해진 나천업(羅千業)이 살았다고 하며 1950년대까지도 마을 뒤 자하산 중턱에 나정승의 묘라고 전해지는 고총이 있었다. 고려 말에는 손씨(孫氏)가 살았다고 전해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신라 중엽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역사는 천년이 훨씬 넘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조에는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이 이곳에서 태어남으로 세 명의 정승 중 두 명이 태어난 셈이 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정승 한 명이 더 배출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자첨이 이 마을을 개척한 이후 아들과 손자는 대를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목민관을 지내면서 청렴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안동 김씨는 입향 초기 3대로 이어지는 문한과 절의를 지키는 청백한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를 바탕으로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 후손들은 조선조에 46명이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하였고 안동 김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사촌 마을에는 김자첨의 증손인 송은(松隱)김광수(金光粹)가 심은 만년송(萬年松), 송은의 증손자인 만취당(晩翠堂)김사원(金士元)이 창건한 만취당, 안동 김씨 종택 등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

[비보 사상에 의해 조성된 사촌 가로숲]

가로숲이라는 이름은 들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조성한 숲이라서 붙여진 명칭이다. 간혹 길을 의미하는 ‘가로(街路)’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 있어 서림(西林)으로도 불린다. 원래의 이름은 마을 남서편의 바위 언덕을 가리고 마을 서편의 긴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어 ‘가리쑤’라고 불렀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세 정승이 나올 수 있는 명당이지만 마을의 서쪽이 허했다고 한다. 마을 왼쪽으로는 좌산이 있는데 오른쪽 지형, 서쪽만은 광활한 들판이어서 옆구리가 비는 형국이었다. 좌청룡이 발달된 데 비해 우백호가 없었다. 풍수지리 사상에 의하면 사람들은 땅의 모양, 바람[風]의 방향, 물[水]의 흐름 등 지리(地理)의 조건이 사람살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굳게 믿었다. 풍수지리 사상에서 비보 사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산천의 역처(逆處)나 기운이 허한 곳을 보충하기 위해 사찰이나 나무를 심는 것을 말한다.

김자첨은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의 비보 사상에 따라 마을의 서쪽 허한 곳을 비보하여 건마산 쪽 절벽을 시각적으로 가리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방풍림인 가로숲을 조성하였다. 이곳은 물길이 짧고 모래가 많아 비가 오면 물이 한꺼번에 흐르고 금방 땅속으로 스며들기 마련이어서 물길도 보호하고 바람도 막기 위해 마을 터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숲을 만들었다. 큰 비가 오면 수시로 하천 둑이 유실되곤 해서 수해 방지용으로도 숲이 필요했다. 이 숲이 조성되자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과 홍수를 막아주어 사촌 마을은 살기 좋은 터전이 되었다.

사촌 가로숲의 경우 오래 사는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 팽나무를 심었다. 들판 한가운데를 흐르는 물길이라 둑에다 숲을 조성한 뒤에도 큰 비가 오면 하천 바닥에 흙이 많이 쌓이고 나무들도 자주 유실되었기 때문에 숲과 하천 관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예전에는 1년에 한 번씩 인근 10리 안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흙을 걷어 내고 숲을 돌보았다고 한다.

느티나무와 상수리로 우거진 사촌 가로숲은 남북 방향으로 형성된 40m 폭의 한실천의 양쪽 둑을 따라 낙동강의 지류인 기천(沂川)[지금의 미천]에 합류하기까지 길이 1,000m 정도로 형성되어 있다. 숲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나무들은 수고 11~17m, 흉고 직경 80~138㎝에 이르고 있어 수백 년 이상의 수령을 보이고 있다. “비온 후 쑤[숲]의 시냇물이 3일 이상 흐르고 모기가 들끓으면 마을의 기가 다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선조들이 일러준 숲에는 지금까지 큰비가 온 후에도 몇 날씩 물이 흘러내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숲은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 문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유성룡이 태어난 사촌 가로숲의 전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아버지 유중영(柳仲郢)사촌 마을에 살고 있던 송은(松隱)김광수(金光粹)의 사위였다. 김자첨의 증손 송은(松隱)김광수(金光粹)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연산군의 난정으로 벼슬의 뜻을 버리고 귀향하여 ‘만년송(萬年松)’[500여 년 된 자단향나무]을 심어 가꾸며 영귀정(詠歸亭)을 건립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1남 6녀를 두어 안동 지방 명문들과 혼인을 통하여 폭넓은 관계를 형성하여 사림(士林)으로서의 기틀을 닦았다.유중영은 결혼하여 처가에 거처하면서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유성룡(柳成龍)은 외가인 사촌 마을에서 태어났고, 외가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서애 연보」에 기록되었다.

큰 인물이 태어나면 항상 전설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촌 마을은 ‘외손이 잘 되는 터’여서 딸들이 해산하러 오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서애 탄생과 관련해서도 서애 어머니가 서애를 낳기 위해 친정집에서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던 중 가로숲을 지나기 전 이 숲에서 해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촌 마을에는 정승 세 명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고, ‘외손이 잘되는 터’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서애의 경우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남귀여가혼, 자녀 균분 상속제로 인해 한 촌락 내에 아들과 사위, 또는 내·외손이 공존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17세기 이후처럼 부계 친족 중심의 동족 부락은 발달하지 않았다. 자녀 균분제는 자녀 또는 내·외손들이 일촌(一村) 내에 함께 살 뿐만 아니라 그 산림 수택(山林水澤)도 공유(共有)·공용(共用)했으며 묘산(墓山)도 공용하도록 하였다. 자녀 균분제하에서는 재주(財主)의 토지와 노비가 자녀와 그 내·외손에게 철저히 분할, 분급하여, 그들이 상속받은 전민이 일촌 혹은 일평(一坪)들에 함께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위가 처가에서 살기 때문에 친정에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이다 보니 유중영의 처인 안동 김씨도 유성룡을 친정에서 낳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사촌 마을에 3정승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보니 그 전설에 “서애 어머니가 서애를 낳기 위해 친정에서 시가로 가던 중 가로숲에서 해산했다”는 이야기로 살이 보태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촌 서림을 관리하는 ‘서림계(西林契)’]

사촌 가로숲[서림]의 소유는 마을을 일군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이며, 숲의 관리는 199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의성군으로 넘어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 문중에 ‘서림계’라는 서림을 관리하는 계가 있었다. 서림계는 마을 사람들이 일명 ‘쑤거렁계’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서림계에서는 서림에서의 땔감용 벌채와 서림의 사사로운 출입을 금하였으며, 유사를 정하여 거렁[제방]의 유지 보수와 정비를 전담하였다. 마을에 서림계 문서인 「서림 계문부(西林契文簿) 병인년(1926) 5월 일」과 「임원록(1987)」이 남아 있다.

1986년에 사촌 가로숲에「서림 사적비」를 세우고, 울타리를 조성하여 염소 등 짐승들로부터 숲을 보호하였고, 1992년에 「안동 김씨 사촌 입향 6백주년 추원비」를 건립하였다. 이 숲은 1999년 천연기념물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사촌 서림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1.08 항목명 변경 및 원고 수정 원 집필자 김호동이 새로 집필한 원고 검수 후 재수록
2013.12.30 원고 삭제 원고 재집필시까지 잠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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