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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형상이 쓴 제주의 인문지리지.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조선 후기 숙종, 정조 때의 문신이자 국학자이며 실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남환박물(南宦博物)』은 1702년 3월부터 1703년 6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한 뒤에 1704년 경상북도 영천의 호연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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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인 김정의 문집. 『노봉문집(蘆峰文集)』은 1735년(영조 11) 1월 제주목사겸호남방어사로 제수되어 그 해 4월에 도임하여 2년 6개월간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 제주도민을 위하여 헌신한 김정[1670~1737]의 문집이다. 김정은 제주목사로 재임 중 글보다는 치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따라서 김정이 제주도에서 쓴 글 중에서도 시는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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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집필한 문집. 이형상이 살던 숙종조는 사회적인 혼란과 사상적 갈등이 심하였다. 나라 경제는 파탄 지경에 빠졌으나 당쟁은 어느 때보다 심하였고, 학문적으로는 실학과 서학이 대두하였다. 이런 와중에 이형상의 학문 세계는 그보다 앞 시대의 인물이었던 유형원이나 후대 인물인 정약용에 비해 뒤질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형상의 문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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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인인 김춘택(金春澤)이 저술한 문집. 김춘택은 늘 당쟁의 와중에 있었다. 1701년 탄핵을 받아 전라북도 부안으로 유배되었다가 1706년(숙종 32) 제주로 이배되어 이후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객이었던 김춘택은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인물들에 비해 행적이 초라한 감이 있다. 그러나 김춘택은 당대의 대문장가인 종조부 서포 김만중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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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에 귀양 온 조선 후기 서재(西齋) 임징하(任徵夏)가 저술한 문집.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임징하는 제주도에서 귀양을 살았으며, 『서재집(西齋集)』은 임징하의 5대손인 임헌회가 수집, 간행하였다. 임징하는 1726년(영조 2)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순안(順安)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727년 7월 대정현 감산으로 이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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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마을. 17세기와 18세기 옛 지도에서 간다시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4~5세기에는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오늘날 민간에서 다시라 하고 병다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 고지도에서 간다시 또는 간다시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원래 다시 또는 다시을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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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후기 판관이었던 강재의(姜在毅)의 거사비(去思碑). 강재의는 1848년(헌종 14) 8월 장인식이 제주목사였던 때에 제주판관으로 부임했다. 강재의는 이현공(李玄功)이 제주목사였던 1851년(철종 2) 2월에 제주도를 떠난 관리로, 송사(訟事)를 공정히 처리하였으며 부하나 백성을 아껴 괴롭히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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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2동에 있는 마을. 17세기 고지도에서 걸마로촌(乬馬路村)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유 음성형은 ‘걸〉걸르〉걸머리’로 실현되어 전하고, 한자 차용표기로는 거마로(巨馬路), 걸마로(乬馬路), 거마로(巨馬老), 걸마로(乬亇路) 등으로 표기하였다. 요즘은 ‘걸머리’ 또는 ‘금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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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1875년(고종 12) 제주목사 이희충(李熙忠)에 의해 창건되어 선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며 서로 교류하던 장소. 이희충이 기록한 『경신재섬학전(敬信齋 贍學錢)』 「절목(節目)」에는 “이 재에는 월봉이 지극히 박해서 해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세금을 거두어서는 지출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접(接)을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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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에 있는 포구. 고내포는 지금의 애월읍 고내리에 있는 성창을 두고 이른 말로 성창은 대략 1230년(원종 11) 무렵에 축조 되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남사록』에서는 고내포에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제주삼현도」에서는 고내봉 자락에 고내리가 있다고는 기록하였으나, 그 앞에 있는 포구는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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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마을. 제주시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는 자연 포구 이름이자 자연 마을이다. 이 마을은 제주4·3사건 때 폐동되었다. 고놀개라고 부르다가 소리가 고늘개로 바뀌면서 곤을개로 인식하여 곤을포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차자표기로 고로포로, 일제 강점기부터 곤을포가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고로촌 또는 고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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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었던 포구. 「제주삼현도」에는 제주시 화북1동으로 흘러드는 화북천과 그 하류 주변에 고로포가 그려져 있다. 고로(古老)나 고로(高老)는 글자만 다를 뿐 음은 같다. 화북천을 끼고 있는 제주시 화북1동의 서쪽 동네를 곤흘동네라고 한다. 『탐라지』에는 “주 동쪽 13리에 있다.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물이 넘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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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지역에서 1차 사료로서의 유일한 가치를 갖는 필사된 기록. 고문서는 현재 문서 자체의 권리·의무 등의 실제적 효력은 이미 상실하였지만 문서의 내용이 다른 것을 베낀 것이 아닌 그 자체로 고유한 내용을 담고 있는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자료이다. 고문서에는 교지(敎旨)·관문(關文)·첩문(帖文)·준호구(準戶口)·소지(所志)·명문(明文)·상환기(相換記)·시권(試券)·분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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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2리 전답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방사탑. 제주도에서는 잡석을 이용하여 탑을 쌓고, 그 위에 새나 사람 등의 형상을 올려놓은 탑을 방사탑이라 하며, 한경면 고산2리에 위치한 방사탑을 전답동 탑 또는 전답동 답이라 일컫는다. 2기의 탑을 구분할 때에는 ‘남답’, ‘여답’ 또는 ‘남자’, ‘여자’라고 한다. 고산리 전답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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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 출신으로 중앙 관리를 역임한 문신. 고성겸은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것을 한으로 여겨 어머니와 상의하여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3년상을 치르니 모두 지극한 효자라 일컬었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극진하여 어머니가 70세로 노쇠해지자 성균관 교수를 사임하였다. 본관은 제주. 자는 원위(元撝), 호는 능봉(菱峰)이다. 아버지는 고응식(高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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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와 금성리에 있는 포구. 곽지포는 지금의 애월읍 곽지리와 금성리에 있는 정짓내 하류에 있는 개맛을 두고 이른 말로, 곽지포는 그 당시「제주삼현도」에 있는 곽지촌(郭支村) 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곽지포를 두고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과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에서는 곽지포(郭支浦),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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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관음사 대웅전에 봉안된 17세기 목조 보살상.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98년에 조성한 작품이다. 본래 전라남도 영암군 성도암에서 개금(改金)한 후 해남 대흥사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후 안봉려관 스님이 1925년 한라산 관음사로 옮겨 봉안한 것이다. 1999년 10월에 시도유형문화재 제16호에 지정되었다. 관음사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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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에 있는 마을. 원래 구오름 또는 구름이라 부르다가 한자 차용표기로 구호음(求乎音)으로 표기하였다. 구호름(求乎廩)으로도 표기하였다. 17세기 고지도에서 구호음촌(求乎音村)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오름은 구호음 또는 구호름으로 표기하다가, 아라1동의 관할인 구산(龜山)이라 하고 있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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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문신. 1858년(철종 9) 10월 구재린(具載麟)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1860년 2월 제주 암행어사 심동신(沈東臣)[1824~?]이 제주의 민정을 규찰하고 중앙 정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제주목사 정우현(鄭愚鉉)·전 제주목사 임백능(任百能)[1795~?]·채동건(蔡東健)[1809~1880]·전 제주판관 구재린·전 대정현감 김기휴(金沂休)[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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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말기 제주목사 구재룡(具載龍)을 기리는 비. 구재룡은 무신으로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39년(헌종 5) 3월에 부임하고, 1841년(헌종 7) 윤3월에 파직되었다. 구재룡은 재임 중 늠료 500여 냥을 내놓아 호적을 닦을 때의 인구미(人口米)로 충당하였고 가파도의 우측(牛畜)을 모동장(毛洞場)으로 옮겨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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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에 있는 조선 말기 제주목사 구재룡(具載龍)을 기리는 비. 구재룡은 제주목사 겸 방어사(防御使)로 1839년(헌종 5) 3월에 부임하고, 1841년(헌종 7) 윤3월에 파직되었다. 재임 중 그는 늠료 500여 냥을 내놓아서 호적을 닦을 때 인구미(人口米)로 충당하였고 가파도의 우측(牛畜)을 모동장(毛洞場)으로 옮겨 방목하였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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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남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구재룡(具載龍)의 선정을 기리는 비. 무신(武臣)이었던 구재룡은 제주목사 겸 방어사(防御使)로 1839년(헌종 5) 3월에 부임하였다가 1841년(헌종 7) 3월에 파직되었다. 재임 중 구재룡은 늠료 500여 냥을 내놓아 호적을 닦을 때의 인구미(人口米)로 충당하였고 가파도의 우측(牛畜)을 모동장(毛洞場)으로 옮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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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 증조부는 권상하(權尙夏)이며 아버지는 제주목사를 역임한 권정성(權定性)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과 덕행이 높은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배웠다. 독서에 전념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나 초선(抄選)에 뽑혀 자의(諮議)가 되었다. 1771년(영조 47)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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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에 있는 포구. 귀덕포는 다름 아닌 복덕포라는 말이며 지금의 한림읍 귀덕1리에 있는 복덕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귀덕리 앞에 복덕포가 있다고 하였다. 귀덕포는 그 당시 귀덕촌 또는 귀덕리의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귀덕리의 바다 밭은 동쪽의 정짓내에서부터 서쪽의 망밧알까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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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귤림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 귤림서원 묘정비는 1850년(철종 1) 제주목사 장인식이 귤림서원의 내력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그 후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1892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 김희정 등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서원비라고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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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한 제주 지역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인명록. 1720년경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서문, 절목, 명단의 순으로 되어 있다. 1558년에 무과에 급제한 양연(梁淵)으로부터 1815년에 급제한 이윤방(李潤邦)까지는 급제연대가 기록되어 있고, 그 후 좌인호(佐仁豪)까지는 연대 기록 없이 성명만 기록되어 있으며 수록된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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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서 농지를 개간한 인물. 김광종은 사재를 털어 1832년(순조 32) 3월부터 1841년(헌종 7) 9월까지 약 10년 동안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의 ‘돌막은-소’에서 ‘도체비-빌레’까지 바위를 뚫어 물을 끌어내어 1만여 평의 농지를 조성하였다. 김광종의 농지 개척은 이후의 새로운 개척을 가능하게 했다. 한말의 채구석(蔡龜錫)은 천제연의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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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김경집이다. 애월읍 납읍리에 사는 큰 진사라 불리던 정헌(靜軒) 김용징(金龍徵)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서당의 훈장을 하면서 한의술에도 능하였다. 1886년(고종 23) 무과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으나 그 해 여름에 서울에서 콜레라로 죽었다. 곽지리 경민장(警民長) 김명관(金明寬)이 서울에 올라가 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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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에 유배된 무신.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친러 정권이 성립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1897년(고종 34) 11월 11일 회합을 갖고 독립협회가 독립문의 기초를 세우는 축하식을 거행하는 날에 군사 정변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용태(李容泰)가 밀고하여 김낙영을 비롯한 정변 모의자 이근택(李根澤)·김사찬(金思燦)·장윤선(張允善)·이용호(李容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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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의 화공.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이형상(李衡祥)[1653~1753]이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하던 해에 제주의 각 고을을 순력하는 행사 장면을 그린 도첩이다. 이 도첩은 300여 년 전 제주의 풍물·문화, 방어 시설, 진상품, 지형, 건물 배치 등을 파악할 수 있게 그려진 실용적 목적의 기록화이다. 김남길은 제주목 소속의 지방 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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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있었던 포구. 김상헌(金尙憲)은 『남사록(南槎錄)』에서, 구좌읍 김녕리의 한개를 대포(大浦) 또는 김녕포(金寧浦)라고 하였다. 대포는 한개라는 포구 이름이다. 김녕포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 이름이다. 이증(李增)은 『남사일록(南槎日錄)』에서, 대포를 달리 김녕포라고도 하였다. 이는 그 당시 대포는 포구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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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여성 자선 사업가. 본관은 김해. 증조부는 김성순(金性淳)이며 조부는 김영세(金永世)로 김응선(金應先), 김응남(金應南), 김응신(金應信), 김응열(金應悅)의 4형제가 있었다. 아버지인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高氏) 사이에서 2남 1녀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김만석(金萬碩), 김만재(金萬才) 두 오빠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사별하고 외삼촌 집에 기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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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조선 후기 행수 내의녀였던 김만덕(金萬德)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1795년(정조 19)에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게 되자 김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으로 쌀을 사들여 제주 백성들을 구휼하였는데, 그 공을 기리기 위하여 1812년(순조 12) 11월 21일에 마을 사람들이 김만덕 묘비를 세웠다. 제주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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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1745년(영조 21) 이산부사 재임 중 사간원정언 이응협(李應協)[1709~?]이 “이산부사(理山府使) 김몽규는 탐욕스러운데다가 불법을 자행하여, 원망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있으며”라는 상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1752년(영조 28) 12월 윤구연(尹九淵)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으며, 1754년 (영조 30) 10월에 영조의 탄신일에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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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김몽규를 기리는 비. 김몽규 제주목사 겸 방어사는 1752년(영조 28) 12월에 제주도에 부임하고 1754년(영조 30) 10월에 파면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삼읍성문(三邑城門) 바깥에 옹중석(翁仲石) 일명 우형석(偶形石)을 새로 세웠으며, 운주당(運籌堂), 관덕정(觀德亭), 읍진창(邑賑倉), 동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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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우도 개간자. 본관은 경주. 자는 공서(公瑞)이다. 아버지는 김재온(金栽溫)이다. 1828년(순조 28)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842년(헌종 8) 우도 개간 허가가 내려지자 1844년(헌종 10) 우도로 들어가서 개척자들을 격려하며 입경자(入耕者)의 자제들을 모아 훈학하였다. 우도에 입주한 후에는 영일동 후편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하였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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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정의현감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해촌(海村). 아버지는 용양위 부호군 김추길(金秋吉)이다. 1662년(현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9년(현종 10) 식년 문과에서 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무안현감, 성균관직강,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등을 지냈다. 1679년(숙종 5) 사헌부장령 재임 중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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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몽휴(夢休). 아버지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김광운(金光運)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된 뒤 1754년(영조 30) 문과 증광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754년 강원도 원주의 보안찰방으로 밀려났다가 곧 복귀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1758년 전라남도 광주의 경양찰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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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수재(水哉). 할아버지는 김극도(金克桃),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김완(金完)이며,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주부(主簿)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감찰로 옮겨졌다. 1627년(인조 5) 청나라 3만 군대를 강홍립(姜弘立)[1560~1627]과 함께 맞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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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744년(영조 20)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778년(정조 2) 남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2월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780년(정조 4) 각 목장에서의 소와 말이 분실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각 산장(山場)의 경계에 담장을 쌓아 군마(軍馬)와 민마(民馬)를 기르는 데 편리를 도모하게 하였다. 또한 홍수로 하천이 범람하여 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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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판관 김영업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김영업은 1814년(순조 14)에 찰리어사(察理御史) 이좌수(李左秀)가 실시한 문과에 김영집(金英集)·강계우(姜繼遇)·변경준(邊景俊) 등과 함께 급제한 뒤 식년방(式年榜)에 급제하였다. 1834년(순조 34) 4월에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였다가 1835년(헌종 1) 6월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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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생전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아관파천 등의 사건들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흥사단이 전개한 민족운동과 대동학회(大東學會)·기호학회(畿湖學會)에 참여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1852~1932]과 연서로 일본 정부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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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경헌(景憲), 호는 남강(南岡). 김응빈(金膺彬)이라고도 한다. 형은 해미현감을 지낸 김응전(金膺銓)이다. 1891년(고종 28)에 무과에 급제한 후 같은 해 8월 윤자선(尹慈善)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으로 부임했다가 모친상을 만나 12월에 제주를 떠났고 후임으로 이규원(李奎遠)이 부임하였다. 김응빈은 관직에서 물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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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정현감을 역임한 관리. 1817년(순조 17) 6월 모달겸(牟達兼)[1749~1821]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부임하여 1820년 4월까지 재임하였다. 1817년 대정현감 재임 중 대정객사를 중창하였다. 대정객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모르나 영안관(瀛安館)이라고 불렀으며 후일 대정공립보통학교가 영안관에서 개교하였다. 또한 대정현감 재임 중에 대정 유생 구제국(具濟國)[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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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이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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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중에 그린 문인화. 「세한도」(歲寒圖)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김정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白眉)이다. 갈필(渴筆)과 검묵(儉墨)의 묘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인화로서, 제주도 유배 중에 그려졌다.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원악절도(遠惡絶島)라고 하는 제주도 유형지에서 힘겨운 유배 생활을 하던 18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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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에서 민란을 일으킨 유생.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동곡(桐谷)이다. 일명 김준현(金俊鉉)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김문환(金文煥)이다. 1858년(철종 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민폐를 예방하기 위해 관리가 공무 수행 중 지켜야 할 지침서인 절목(節目)를 작성하여 관리들에게 경고하였다. 유학을 연구하고, 영호남의 유림과 교유하며 식견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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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 출신의 문인. 본관은 광산. 자는 진숙(晋叔), 호는 명도암(明道菴). 아버지는 김경봉(金景鳳)이며, 구좌읍 한동리 태어나 처가인 봉개리의 명도암으로 옮겨 살았다. 제주에 유배 온 실학자 이익(李瀷)[1579~1624]에게 수학하였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1643년(인조 21) 숙녕전참봉에 천거되었으나 고향에서 후생을 가르치기로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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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아버지는 김정실(金鼎實)이다. 1763년(영조 39) 7월 제주에서 심래복(沈來復)[?~1763], 조영득(趙榮得), 유동혼(柳東渾) 등이 영조를 내쫓고 왕족인 이훈(李壎)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역모가 발각되었다. 이에 조정은 1763년 10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이수봉(李壽鳳)[1710~?]을 제주위유어사(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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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에 일어난 제3차 제주민란의 주모자. 1862년(철종 13) 2월 임헌대(任憲大)[1817~?]가 제주목사에 부임한 이후 화전세(火田稅)를 과중하게 책정하여 민심이 흉흉해졌는데, 이는 1862년 제주민란으로 확대되어 세 차례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김흥채는 제3차 민란 주모자로서, 1862년 11월 15부터 12월 9일까지 제1차 민란 주모자 조만송(趙萬松),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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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군수와 정의군수를 역임한 관인. 본관은 김해. 자는 장녀(長汝),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만호 김계병(金啓柄)이다. 1879년 무과에 급제하여 1888년(고종 25)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1890년 강원도 평창군수를 역임하였다. 1897년(광무 1) 12월 29일 유긍환(兪兢煥)의 후임으로 제주군수로 부임했다. 제주군수 재임 중인 1898년 지금의 제주의료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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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증이 제주안핵경순무어사로서 활동할 때의 일을 일기체로 수록한 책. 이증(李增)[1628~1686]은 1678년(숙종 4) 증광시 병과에 입격한 이듬해인 조선 숙종 5년 제주안핵경순무어사로 파견되었다. 『남사일록(南槎日錄)』은 1679년 9월 한양을 떠나 제주에 도착한 경위와 그 뒤의 행적, 귀경 과정을 일기체로 수록한 기록문이다. 당시 우의정이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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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조선 후기에 세워진 교육 기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재생과 늠료를 두었다. 서당은 종래의 여러 교육 기관과 성격이 다르지만 교육 기관이라는 이유로 특권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권적인 보호는 특히 군역 면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남서학당은 제주목 상가에 있었는데, 지금의 제주특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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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박지원이 왕명을 받아서 쓴 제주 사람 이방익의 중국 표류기. 「남유록(南遊錄)」은 제주 사람 이방익(李邦翼)[1756~?]의 중국 표류기이다. 다만 그의 글 솜씨가 부족함을 알고 정조가 박지원에게 대신 쓰게 한 것으로, 간략하나마 중국의 여러 지역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1796년(정조 20), 이방익은 당시 만경현령으로 재직하던 아버지 이광빈을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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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9년 김성구가 정의현감 재임시에 저술한 일기체 형식의 문헌. 김성구(金聲久)[1641~1707]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이며 호는 팔오헌(八吾軒) 혹은 해촌(海村)이다. 1662년(현종 3)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무안현감·직강·정언 등을 거쳤으며 1679년(숙종 5) 정의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정권에서 멀어져 있던 김성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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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 있는 옛 사찰터. 납읍리 마을의 서쪽 일명 ‘절빌레’는 현재 도로 개설과 함께 주택지 등이 들어서면서 ‘절빌레’의 원형이 완전히 손상된 상태여서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또한 이 절빌레 북쪽에는 절물이라 불리던 용천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절빌레’ 바로 앞은 사찰 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옛 납읍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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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된 인물.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역모죄로 사사(賜死)되었으며, 3년 후인 1616년(광해군 8) 부관참시되었다. 김제남의 아들 김래·김규·김선도 목숨을 잃었다. 김제남의 가족 중 손자 김천석(金天錫)과 노씨부인만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1616년(광해군 8)에 유생 이공헌·박몽준 등이 노씨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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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월평동에 있는 마을. 다라콧 또는 다라쿳은 월평동의 옛 이름이다. 17세기 고지도에서 별라화촌(別羅花村)[다라콧을, 다라쿳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라콧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한자 차용표기로 별라화촌으로 표기하였는데, 조선 후기부터 월평리가 되었으며, 아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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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조선 시대 활터. 달관대는 조선 후기에 제주목사 김정[1670~1737]이 돌에 달관대(達觀臺)라 새기고 그 위에 과녁을 설치해서 활을 쏘는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신광수(申光洙)가 지은 『탐라록(耽羅錄)』에 ‘재삼천서당방(在三泉書堂傍)’이라고 쓰여 있듯, 근처에 역시 김정 목사가 설립한 삼천서당이 자리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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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2동에 있는 포구. 대독포의 대독(大瀆)은 제주시 용담2동의 자연 마을인 한두기의 뜻과 음을 빌린 한자 차용 표기이다. 따라서 대독포는 한두기라는 자연 마을에 있는 포구라는 말이다. 이증(李增)은 “용추는 주(州) 서쪽 5리에 있다. 그 하류를 대독포라고 한다. 그 아래쪽에 용추가 있다. 끝이 없을 만큼 깊다. 가물어 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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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재임할 당시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 달 간 걸쳐 순력(巡歷)하고 돌아와서 그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도첩(圖帖)으로, 채색화이자 기록화이다. 기록화는 특정한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을 말한다. 중앙에서는 도화서 화원(畵員)들이 의궤도를 비롯한 기록화를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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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1동과 내도동 사이에 있는 포구. 도근천포는 지금의 제주시 외도1동과 내도동 사이로 흐르는 내[川]인 도그내의 하류에 있는 개맛과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다. 도근천포 즉 조공천(朝貢川)은 그 당시 조공천이라는 내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남사록』에서는 도근천(都近川)이라 하였으며,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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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두1동에 있었던 포구. 도두포, 즉 도원포(道圓浦)는 그 당시 도두촌(道頭村)(「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竝書)」)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것이다. 도도리는 ‘도도리’의 한자 차용의 표기이고, 도원(道圓)의 도(道)는 음을, 원(圓)은 뜻을 빌린 표기다. 지금의 제주시 도두1동의 옛 이름이 도두리(道頭里)다. 도두1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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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두1동에 있는 포구. 도원포는 지금의 제주시 도두1동에 있는 갯돈지를 두고 이른 말인데, 도원포는 「탐라지도병서」에 나와 있는 도두촌 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남사록』에서는 도도리포라고 하면서 병선도 감출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도도리는 도도리의 한자 차용 표기이고, 도원의 도는 음을, 원은 뜻을 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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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하던 액(厄)막이 풍속. 대개 연말에 토정비결이나 신수를 보아서 새해 운수가 나쁘다고 판단이 되면 그 사람은 정월 대보름날 짚으로 인형을 만들고 그 운수 나쁜 사람 대신 삼도전 거리나 아니면 바닷가에 모셔가 버려서 액막이를 한다. ‘방쉬’는 방사(防邪) 즉 액이나 부정(不淨)을 막는 것을 뜻한다. 볏짚으로 사람 모양의 허제비[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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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 있는 포구. 독포는 지금의 한림읍 옹포리에 있는 동개와 모살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독포는 그 당시「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독포촌 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이증은 독포를 두고 “이선(李選)이 순무할 때 명월진을 옮기려 했던 곳이며, 옛적에 전강을 정박시켰던 곳이다. 포구는 비좁아 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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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두모리에 있는 포구. 두모포는 지금의 한경면 두모리에 있는 코짓개를 두고 이른 말이며, 두모포는 살레루라는 땅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두모포는 두모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그 당시 이 포구는 지명 이름 또는 마을 이름을 취하여 표기를 하였다. 『남사록』에서는 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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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포구. 두원포는 지금의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두머니개를 두고 이른 것이며,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두원포(頭元浦)라는 포구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용항포와 종달포 사이에 두원포가 있다고 하였다. 구좌읍 종달리에 두머니개라는 포구가 있다. 두원은 두머니개의 한자 차용 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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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에 있는 포구. 마두포는 지금의 한림읍 한림리에 있는 옹덩개와 밧옹덩개를 두고 이른 말이며,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마두천(馬頭川)이라는 지명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에서는 이곳을 마두포 또는 명월포라 하였으며, 명월호소 소속 전선 1척과 함께 병선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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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지역에서 시행된 목장내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마장세는 1799년(정조 23) 제주목사 조명즙(曺命楫)이 신설한 수취 제도이다. 마감, 목자, 장교, 그리고 군인 등의 녹료(祿料)를 지급하기 위해 목마장 안의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양곡에 대해 세금으로 쌀을 걷었다. 목장세(牧場稅), 장세(場稅) 또는 장전세(場田稅)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 영조·정조대에 들어와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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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에 제사 지냈던 마조단의 옛 터. 방성은 천사성이라고도 하며 곧 말의 조상을 의미하는데 마조단에서 지내던 제를 마조제라고 하며, 제주 지역에서는 인류에게 유용하게 쓰인 말에 대한 감사와 기원을 담아 제를 지냈다. 제주 지역에서 언제부터 말의 조상신인 방성에 대해 제를 지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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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인 김만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채제공이 쓴 조선 후기의 소설. 『번암집』에 수록된 「만덕전」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정조실록』에 김만덕이라는 제주의 실재 인물이 제주에 큰 기근이 들자 전 재산을 내놓아 굶주린 제주도민을 구휼했다는 내용이 있다. 김만덕의 선행을 널리 알리고 만인의 본보기로 삼고자 나온 소설이다. 김만덕은 본관이 김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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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추자도에 유배된 안조환(安肇煥)이 유배 생활에 대해 지은 국문 가사. 조선 정조 때 안조환이 나이 34세에 추자도에 유배 가서 지은 장편 가사로, 추자도에서의 생활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당시의 유배자의 생활과 추자도 주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작자는 양반이 아닌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유배지에서 주민들에게 박대를 당했던 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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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의 문인인 이한우의 글을 묶은 문집. 『매계선생문집』은 제주 출신 문인인 이한우(李漢雨)[1818~1881]의 글을 묶은 문집이다. 이한우는 조선 순조 때 사람으로 제주시의 매촌(지금의 도련2동)에서 평생을 살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매계선생문집』 외에 이한우의 글이 실려 있는 책으로는 석호(石湖) 고영흔(高永昕)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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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련2동에 있는 마을. 매돈지는 돈지 또는 매돈지의 변음을 반영한 것으로, 제주시 도련2동의 옛 이름이다. 매돈지는 매돈지(每敦地) 또는 매돈지(每敦支) 등으로 표기하다가, 일제 강점기부터 매촌(梅村)으로 표기하였다. 매돈지는 맨돈지의 변음으로, 온전한 돈지(둔덕의 제주어)라는 뜻이다. 17세기 고지도에 매돈지촌을 확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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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제주 목사 심낙수가 산마장의 경작자들로부터 받아 오던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제정한 시행령. 조선 후기 영·정조 대에 들어 제주 지역에는 가뭄과 흉년이 빈발하면서 목마장이 폐장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1770년(영조 46)부터 일부 폐장된 목마장의 개간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기 시작했고, 제주목에서는 관아의 재정 수입을 위해 개간을 허락하여 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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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강동에 있는 마을. 제주시 용강동은 웃무드내라 하고 영평하동은 알무드내라고 하여 무드내는 용강동과 영평하동에 걸치는 내 일대를 이르는 마을이다. 제주시 용강동과 영평하동을 지나는 내 이름인데, 이 일대에 형성된 마을의 이름으로 발전하였다. 무드내를 한자 차용표기로 무등천으로 표기하였다. 17세기 고지도에서 무등촌(無等川村: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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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있었던 포구. 무주포는 지금의 구좌읍 월정리에 있는 배롱개, 그리고 배롱개가 거느리고 있는 물개와 새물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는 무주촌(無注村) 앞에 무주포(無注浦)가 있다고 하였다. 무주포는 당시 무주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 이름이다. 즉, 무주포는 무주촌에 있는 포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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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향교 교수를 지낸 문신. 본관은 남평. 자는 인경(仁卿)이다. 아버지는 문재박(文在樸)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에서 태어났다. 1664년(현종 5) 8월에 조정에서 정언 윤심(尹深)을 제주시재어사로 보내어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였을 때 문과에 문영후·문징후(文徵後)[1632~?]·고홍진(高弘進)[1602~1682] 등 3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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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효자. 본관은 밀양. 아버지는 박려한(朴麗漢)이다. 한림읍 옹포리에서 태어났다. 제주목의 서리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710년(숙종 36) 12월 파직되어 떠나는 제주목사 최계옹(崔啓翁)[1654~?]을 따라 진상품을 싣고 출항하였다가 파선되어 겨우 사서도(斜鼠島) 근처에서 표착하였다. 부서진 배의 판자 조각에 부모와 이별하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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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81년(고종 18) 5월에 백낙연(白樂淵)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83년(고종 20) 5월까지 재임하였다. 1885년(고종 22)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내다가 1886년(고종 23)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다. 『고종실록』과 『제주계록(濟州啓錄)』에 따르면 1881년 윤 7월 제주에서 공마(貢馬) 107필을 사복시(私僕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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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에 표착하여 귀화한 네덜란드인.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났다. 한국명은 박연, 중국식 이름은 호탄만(胡呑萬), 원명은 벨테브레(J.J.Weltevree)이다.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1626년(인조 4)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으로 출항하여 이듬해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k)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으로 제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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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시재어사(試才御使)로 제주에 파견된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아버지는 박춘보(朴春普)이며,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서 태어났다. 1773년(영조 49)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1781년(정조 5) 6월에 제주순무안사시재어사(濟州巡撫按査試才御使)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하사한 『속명의록(續名義錄)』과 『속명의록어해(續名義錄義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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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일어난 제주민란의 주도자. 본관은 남양. 자는 성칠(聲七), 호는 능헌(菱軒). 본명은 방진두(房鎭斗)이며 일명 방갑(房甲)이라도도 한다. 아버지는 방상규(房祥圭)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부인은 김해김씨이다. 1898년(고종 35) 방성칠은 강벽곡(姜辟穀)·정세마(鄭洗馬) 등과 함께 남학당 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전라도로부터 제주에 들어와서 능화동(현재 제주특별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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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지역을 무대로 한 판소리 「배비장 타령」을 개작한 한글 소설.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인 「배비장 타령」을 한글 소설로 개작한 것으로, 조선 말기의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다.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들의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서민들의 양반에 대한 보복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본으로는 현재 2종의 한글본이 있다. 이 작품의 작자와 출전은 미상이며, 그 창작 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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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본관은 수원(水源)이고, 자는 도원(道源)이다. 아버지는 동금(同禁) 백희수(白希洙)이고, 어머니는 윤민동(尹敏東)의 딸이다. 1877년(고종 14) 1월 이희충(李熙忠)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881년(고종 18) 5월까지 임기를 훨씬 넘겨 4여 년이나 재임하였다. 부임하던 해 가을에 메뚜기 떼로 농사에 큰 피해가 발생하여 주민이 굶주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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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51년(철종 2) 7월 이현공(李玄功)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귤림서원을 개건하였으며, 1851년 가을 별저미(別儲米)를 운반해 줄 것과 내탕전 1천 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전년의 흉년을 진휼하였다. 1852년(철종 3) 유생 강기석(姜琦奭)의 건의에 따라 제주성 남수구 북쪽 김정(金淨)의 적거지에 김충암적려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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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백희수(白希洙)의 선정을 기리는 비. 백희수는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51년(철종 2) 7월에 부임하였다가 1853년(철종 4) 12월에 교체되었다. 백희수는 귤림당(橘林堂)을 개건하였으며 충암(沖庵) 김정(金淨)의 적거유허비(謫居遺墟碑)에 비각을 세웠다. 그 해 여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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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동과 용담2동 사이에 있었던 포구. 벌랑포는 지금의 제주시 삼도동과 용담2동의 자연마을인 동한두기에 있었던 부러릿개를 두고 이른 말이며, 당시 벌랑(伐浪)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병문 내 하류에 벌랑포가 있다고 하였다. 이 내를 부러릿내라 하였으며, 그 하류에 있던 포구를 부러릿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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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었던 별방진(別防鎭)의 포구. 별방진은 한개창 이라는 포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김상헌(金尙憲)은 『남사록(南槎錄)』에서 한개창을 두고 대포(大浦)라고 하면서 병선(兵船)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 대포(大浦)는 ‘한개’의 한자 차용의 표기다.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에는 별방촌(別防村) 아래 별방진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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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아버지는 찰방 변성보(邊聖輔)[1727~1798]이며 애월읍 남읍리에서 태어났다. 1814년(순조 14) 제주찰리겸위유어사(濟州察理兼慰諭御使)로 이재수(李在秀)[1770~1822]가 부임하고 과거 시험을 실시하여 문과에 4명, 무과에 60명을 합격시켰다. 이때 변경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문과의 초시와 복시를 치루지 않고 바로 전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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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 있었던 포구. 변막포(邊幕浦)는 조선 후기 변막촌(邊幕村)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딴 포구의 이름이다. 변막포는 지금의 구좌읍 동복리에 있는 펄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지금 이 마을은 새성창과 펄개라는 두 개의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 새성창은 새로 만든 ‘성창’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마을의 옛 포구는 ‘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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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여(重汝)이다. 아버지는 변희로(變希蘆), 어머니는 남평문씨이다. 아내는 강씨이며, 형은 변시익(變是翼)과 변시한(變是翰)이 있다. 1727년(영조 3) 제주에서 실시된 과거에서 시제(試題) ‘해불양파삼년부(海不揚波三年賦)’로 혼자 합격하여 문과의 초시와 복시를 치루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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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에 있었던 포구.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금돈지와 엉물머릿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화북포(禾北浦)는 화북촌(禾北村)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화북촌(禾北村)의 포구는 연디밋코지와 남당머리콪 사이 후미진 곳에 있다.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내는 ‘지방여’ 와 ‘여’는 어느 정도 북풍을 막아 준다. 그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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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남동 보덕사 소장의 17세기 후반 목조여래좌상. 1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만한 상호와 유려한 법의, 균형 잡힌 동체 등 각부의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불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2004년 9월에 제주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나발의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이마에는 수정으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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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보림사에 있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림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957년 보림사 창건 당시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에서 기증받아 봉안한 것이다. 17~18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충청남도 부여군 무량사 소조 아미타여래좌상과 경상북도 상주시 북장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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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제주도 진상마의 내역을 기록하여 전라도 감영에 보고했던 내용을 베껴놓은 책. 보초(報草)는 하급 관서에서 상급 관서로 보고한 문서인 첩보(牒報)와 관련된 문서들을 베껴놓은 책이며, 등록(登錄) 또한 훗날 참고 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관청에서 조치하여 행한 일이나 사실 가운데 중요한 것을 주무 관서에서 그대로 기록하여 만든 책이다. 이 『보초 등록』은 1794년(정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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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정현감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겸(子謙). 아버지는 부도훈(夫道勛)이다. 1794년(정조 18) 심낙수(沈樂洙)[1739~1799]가 제주위유안핵순무시재어사(濟州慰諭按覈巡撫試才御使)에 부임하여 과거 시험을 실시하였을 때 7명이 급제하였는데, 부종인은 책(策)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1795년(정조 19)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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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있었던 포구. 북포는 지금의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큰성창’을 두고 이른 말이다. 북포는 그 당시 북포촌(北浦村)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딴 포구이다.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는 북포촌 앞에 북포(北浦)가 있다고 하였다. 민간에서는 지금의 조천읍 북촌리의 북포촌을 두고 ‘뒷개’라고 이른다. 북포와 북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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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국립제주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분청사기 편병. 편병은 야외용으로 간편하게 물, 또는 술 등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든 실용적인 그릇이다. 제작 방법은 물레 성형 후 양면을 두들겨 평평하게 만들거나, 양면 판을 따로 성형하여 접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병 중 하나로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6세기경에 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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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포구. 사귀포는 지금의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돔베성창을 두고 이른 말이다. 이증(李增)의 『남사일록』에서는 차귀진에 들른 다음 죽도(지금의 차귀도)로 가려고 명월포에서 배가 오기로 하였는데 파도가 높고 험하여 그 배가 이곳까지 건너올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사귀포는 차귀진 소속의 군선도 감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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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제주목사가 사직(社稷)을 배향하여 제사 지내던 사직단의 옛 터. 사직단이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모셔 제사 지내던 곳인데, 사직에 대한 제사는 곧 농업 국가로서 국가 경제의 기초를 지켜주는 신에 대한 제사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직단은 왕이 있는 한성부에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각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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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 1동 삼성혈 경내에 있는, 조선 영조 때 제주 목사 김정이 세운 탐라 시대 삼 신인 관련 유적비. 삼사석비는 탐라국의 시조인 고(高)‧양(良)‧부(夫) 세 신인(神人)이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배필로 맞아 각자 살 땅을 정하려고 화살을 쐈다는 전설을 적은 비석이다. 2011년 5월 9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삼사석비는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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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삼성(三姓) 신인들을 모시는 사당. 삼성사는 고·양·부 삼성 신인들을 모시는 사당으로서, 제례는 향교의 석전과 제복을 갖추어 매년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 추제를 지낸다. 삼헌관은 고·양·부 세 성씨가 윤번제로 하고, 12월 10일 건시제(乾始祭)는 제주 도민제로 모시었다. 초헌관은 지방 장관, 아헌관과 종헌관은 기관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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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동1동에 있는 조선 후기 때 제주 삼성혈(三姓穴)에 세워진 비. 제주도의 고(高)·양(梁)·부(夫) 3성씨의 시조격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의 3신인(神人)이 각각 솟아났다는 제주 삼성혈이라는 유적에 세워진 비를 말한다. 『제주지(濟州誌)』나 『고려사(高麗史)』 등의 삼성 설화에 따르면 “태초(太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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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 일대에 위치한 봉우리.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표고 574.3m, 비고 139m, 둘레 2,473m, 면적 412,000㎡, 저경 725m의 오름이다. 오름 정상 분화구에 샘이 솟아나와 세미오름이라 부르던 것이 지금은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한 삼의양악(三義讓岳), 삼의악(三義岳)으로 불려지고 있다. 세미양오름, 새미양오름의(三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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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서당. 1736년(영조 12) 제주목사 이 산지물 동쪽 동산에 세운 서당이다. 제주 전 지역의 선비가 이곳에서 글공부를 하였으며, 김정이 비용을 내어 후진들도 양성하였다. 1893년(고종 30)에 김정을 기리어 김정흥학비를 세웠는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번지에 있는 오현단(五賢壇)에 남아 있다. 삼천서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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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조선 후기에 세워진 교육 기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재생과 늠료를 두었다. 서당은 종래의 여러 교육 기관과 성격이 다르지만 교육 기관이라는 이유로 특권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권적인 보호는 특히 군역 면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남학당은 제주목 오등에 있었는데, 지금의 제주특별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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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회천동에 있는 마을. 17세기 고지도에서 천미촌(泉味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미 일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천미촌 또는 천미리라 하다가, 19세기에 이웃한 세미을 세은쇄리와 통합하여 세천리라 하다가 20세기 초부터 다시 회천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5년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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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1동에 있었던 포구. 소흘포는 지금의 제주시 삼양1동에 있는 ‘동카름성창’을 두고 이른 말이다. 원당포(元堂浦)는 지금의 제주시 삼양동에 있었던 포구로, 원당포를 두고 옛 문헌은 소흘포(所訖浦)라고도 하였다. 소흘포는 당시 소흘촌(所訖村)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이다.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에는 원당봉(元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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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에서 민란을 일으킨 유생. 1894년(고종 31) 송계홍(宋啓弘)은 수구적인 유생 이연보(李淵寶)와 강유석(姜瑜奭) 등과 함께 일본의 강압으로 시행되고 있던 갑오개혁에 반대하여 민란을 계획하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그 영향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가운데 이연보는 난을 일으켰고, 제주목사는 이연보를 체포하여 신설된 제주경무청에 수감하였다. 이에 격분한 송계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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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무신. 호는 귤헌(橘軒). 제주목 성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송신(宋藎), 형은 위죽당(爲竹堂) 송지옥(宋之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구한말 당대의 부호이다. 1892년(고종 29) 7월, 안승관(安承觀)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했다가 같은 해 9월에 떠났다. 짧은 기간 재임하면서 자신이 받은 급료를 내어놓고 낡은 폐단을 개혁하여 주민들이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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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아명은 송성뢰(宋聖賚)이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89년(숙종 15)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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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후기 우암 송시열이 적거했던 유허지.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의 적거 기간은 불과 3개월에 불과하지만 귤림서원과 산지천에 있는 경천암에 제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주 지역에서는 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나이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된 송시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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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원경(元卿), 호는 우수(迂叟). 아버지는 송증(宋拯)이다. 1683년(숙종 9)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690년(숙종 16) 사간원정언에 올랐으며, 당시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 처우문제의 상소를 올렸다. 이어 사헌부지평을 지냈으며, 1696년(숙종 22) 경성판관 재임 중 정사를 잘 돌봐 품계가 올라 16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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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당리와 신창리 사이에 있는 포구. 송포는 지금의 한경면 용당리와 신창리 사이에 있는 텟개를 두고 이른 말이며, 솔래라는 지경 이름, 또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남사일록』이나 『남일록』에서는 송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오성찬은 신창리에 “솔래·솔해·솔개(松浦)가 있는데, 이 마을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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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3동에 있는 포구. 수근포는 지금의 제주시 용담동 닷근내라는 자연마을에 있는 닷근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수근포는 『여지도』 등에 나와 있는 수근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수근포를 수포라 하였으며, 그 주변에 연대와 성곶(星串)을 그려 넣었다. 이 연대를 수근연대라 하였으며, 성곶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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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아우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10대손인 신내(申淶)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 이의홍(李儀鴻)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한양에서 생활하는 동안 홍양호(洪良浩)[1724~1802]와 교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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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판관·대정현감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천수(天受). 아버지는 참판 신상흠(愼尙欽)[1794~1874]이다. 1862년(철종 13) 제주안핵겸찰리어사(濟州按覈兼察理御使) 이건필(李建弼)[1820~?]이 부임하고 과거를 실시하여 문과에 5명, 무과에 38명을 선발할 때 합격하고 1863년(철종 14)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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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 있었던 포구. 신천포는 지금의 조천읍 신촌리에 있는 ‘큰물성창’을 두고 이른 말이다. 신천포는 그 당시 신촌(新村)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신촌은 돌코지성창과 큰물성창이라는 두 개의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 포구의 규모나 입지 조건으로 미루어 보면, 신촌포는 큰물성창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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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조천포구가 있는 조천마을과 이웃한 신촌에 신촌향사가 있는데, 이곳은 조선 후기에 지방의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신촌향사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건물은 원래 신촌마을의 중동 길가 왼쪽에 있었으나, 그 위치가 적당하지 않아 1805년(순조 5)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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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위유안핵순무시재어사·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문(景文), 호는 일환재(一丸齋) 혹은 은파(恩坡). 할아버지는 영의정 심지원(沈之源)[1593~1662], 아버지는 심형운(沈亨雲), 어머니는 승지 김고(金槹)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가정이 가난하였으나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775년(영조 51) 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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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암행어사로 파견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민(士敏). 아버지는 심문(沈雯), 병조판서 홍명주(洪命周)[1770~?]의 외손자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1850년(철종 1)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59년(철종 10) 11월에 제주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리의 비행을 암행하여 뇌물을 받은 제주목사 정우현(鄭愚鉉)을 파면하고 선정을 베푼 제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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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어사 심동신의 선정비. 심동신이 1859년(철종 10) 11월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제주목사 정우현(鄭愚鉉)을 뇌물죄로 파직시키고, 1860년(철종 11) 도민의 시전(柴錢) 4백 냥을 감면해 주었다. 또한 제주성의 효자 김광숙(金光淑), 오라리의 양일복(梁日福)의 처 열녀 김씨, 매촌(梅村)의 변지환(邊之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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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아버지는 심익연(沈益衍)이고, 작은 아버지는 심정연(沈鼎衍)[?~1755]이다. 1728년(영조 4) 소론 일파가 일으킨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에 심래복의 삼촌인 심성연(沈成衍)·심익연(沈益衍) 형제가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1755년(영조 31) 2월 나주의 벽서 사건이 수습되고 5월에 실시한 과거 답안지에 심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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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심상연(沈相演)의 선정을 기리는 비. 심상연은 무신이며 절제사 겸 방어사로 1683년(인조 16) 6월에 부임하였다가 1685년(인조 18) 9월에 교체되었다. 재임 시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문관이 제주목사로 재임할 때에 한하여 승보초시(陞補初試)를 설치하여 해마다 시(詩)와 부(賦)로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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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방어사 심영석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심영석 이건향교비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1826년 제주방어사로 부임했던 심영석이 당시 광양에 있던 향교를 현재의 향교 자리로 옮기기 위해 노력한 공을 치하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제주에는 심영석 이건향교비 외에 ‘심영석 청덕선정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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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심영석을 기리는 비. 심영석은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26년(순종 26) 6월에 부임하고, 1827년(순종 27) 8월에 파직되었다. 심영석은 재임 기간 동안 제주 지역 남정들이 매년 바치는 시초(柴草) 2단(丹)을 본전(本錢)으로 만들어 영원히 일단(一團)을 감하였다. 또한 조천, 화북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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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 인다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사찰터. 아라동 사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대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절터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경사가 진 지형이다. 남쪽으로는 인다 건천이 흐르고 있다. 지표면에는 기와편들과 백자 및 청자편들이 산포되어 있다. 북쪽 과수원 지대에서는 백자 파편과 옹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아라동 사지에서는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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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에 있는 마을. 아라호는 한자 차용표기에 따라 아라호로 표기하였다. 아라호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 민간에서는 아라위로 불린다. 17세기 고지도에서 아라호촌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라호 일대에 형성된 마을을 아라호촌이라 하였는데, 18세기에는 아라호리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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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선여(善餘). 아버지는 안건(安鍵)이며,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8년(영조 14) 1월 전라북도 고부군수에 부임하였지만 1738년 10월에 백성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 하여 감금되었다. 1740년(영조 16) 9월 조동점(趙東漸)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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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진무(濟州鎭撫) 김대황(金大璜)이 쓴 표류기. 김대황 등 제주인 24명이 안남(安南國)에 표류하였다가 3명을 이국땅에 장사 지내고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귀환했는가를 보여주는 해양 기록이다. 1687년(숙종 13) 9월 3일 김대황 등 24명은 제주목사가 진상하는 3필의 말을 싣고 출항했다가 추자도 앞에서 동북풍을 만나 31일 동안 표류하다가 안남국 회안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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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도 정의현의 안민고 운영 세칙을 기록한 시행령. 제주의 정의현은 군량 밑천이 부족하고, 땅이 척박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가을에 백성들이 곤궁하며, 밀납과 표고가 산출되지 않아 진상을 하는데 그 구입비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정의현의 안민고는 조선 후기 지방 관아에 설치되었던 민고의 하나로, 이러한 정의현의 재정 부족분 충당과 선격(船格), 포작(鮑作), 봉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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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에 있는 세 사람의 정려비를 한데 모신 조선 후기의 정려각. 『박씨삼정문록(朴氏三旌門錄)』에 따르면 박계곤(朴繼崑)[1675~1731]은 성품이 돈후하고 몸가짐이 신중했으며, 효도와 우애가 남달라 몸을 아끼지 않고 어버이를 공양하여 자식 된 직분을 다 하였다고 한다. 박계곤의 딸인 박씨 부인은 이항춘(李恒春)과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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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 있는 포구. 애월포는 지금의 애월읍 애월리에 있는 큰돈지·샛돈지·족은돈지를 두고 이른 말이다. 애월포는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애월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 이름이다. 『남사일록』에 의하면 애월포는 제주도 북쪽에 있는 다섯 개의 연육포구 중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남사록』에서는 이곳에 당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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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 출신의 열녀. 본관은 여산(礪山). 아버지는 통정대부첨추오위장 송민환(宋敏桓), 어머니는 여산 한씨 한응성(韓應性)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지조가 있었고 친정이 부호였으나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았다. 양기석과 결혼하였는데, 남편이 종숙(從叔)에게 양자로 가게 되어 시집에 생가와 양가 두 어머니가 같이 계셔서 집안이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데도 원망하지 않고 집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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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서 실시된 시취(試取) 때 합격한 문신. 본관은 제주. 자는 대비(大庇). 아버지는 양임로(梁壬老)이며 할아버지는 향공진사 양수영(梁秀瀛)이다. 한림읍 동명리에서 태어났다. 제주판관 오명계(吳命季)[1682~?]의 비리가 조정에 보고되면서 1738년(영조 14)에 제주순무시재어사 이도원(李度遠)[1684~?]이 부임하여 1738년 8월에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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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경기도 남양부사 재임 중인 1771년(영조 47) 2월에 안종규(安宗奎)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고, 1773년(영조 49) 3월에 죄인을 두둔하였다 하여 체포되었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772년 제주 삼성혈에 담을 쌓고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 또한 제전(祭田)을 제주목사의 자문 기관인 유향소(留鄕所)에서 사용하도록 배려하여 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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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본관은 남원. 자는 경보(敬甫). 아버지는 부사정을 역임한 양종임(梁鍾任)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4년(고종 1) 2월 14일 제주목사에 임명되어 3월 정기원(鄭岐源)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 『훈민편(訓民篇)』을 저술하여 제주도민을 계도하였고, 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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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3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양헌수를 기리는 비. 양헌수는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64년(고종 1) 3월에 부임하였다가 1866년(고종 3) 8월에 승지(承旨)로 전출되었다. 양헌수는 부임하던 해에 『훈민편(訓民篇)』을 저술하여 백성을 가르쳤고, 다음해 7월에는 큰 비바람으로 모든 곡식이 절종(絶種) 상태에 이르자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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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양헌수(梁憲洙)의 공덕을 기리는 비. 양헌수는 백성들을 가르쳤고 1865년(고종 2)에 발생한 흉년 때에는 기민 구제에도 힘썼다. 양헌수는 정사를 명백 공평(明白公平)하게 행하였으며, 효열(孝烈)을 현창(顯彰)하고 폐막(弊瘼)을 일소하였다. 양헌수가 제주도를 떠날 때 사녀(士女)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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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있었던 포구. 어등포는 지금의 구좌읍 행원리에 있는 ‘한갯목’과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다. 어등포는 조선 후기에 어등포리에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구좌읍 행원리를 두고 어등개라고 한다. 그렇다고 행원리의 마을에 어등개라는 포구나 지명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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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세워진 교육 기관. 역학당은 관덕정 동쪽 좌위랑에 위치해 있던 서당으로, 18세기 이후 등장했던 개량서당 교육 기관이었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에 의하면, “재관덕정좌위랑 역학왜학동거 배제번삼 학생일백칠십육명(在觀德亭左衛廊 譯學倭學同居 排除番三 學生一百七十六名)”이라 하여 다수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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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조선 후기 누각. 연교정은 제주목사 김정이 1737년(영조 13)에 세운 누각으로, 임금의 교서를 받들고 전문(箋文)을 올릴 때에 그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전문은 길사나 흉사가 있을 때에 지방관이 왕에게 아뢰는 사륙 문체의 글을 말한다. 정조의 대전탄일(大殿誕日)에 지방관이 축하하는 전문을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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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름다운 경관 십경(十景)을 그린 기록화. 「영주십경도(瀛洲十景圖)」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10여 곳을 골라 그린 그림첩이다. ‘영주’는 ‘탐라’와 마찬가지로 제주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영주 십경은 제주 십경을 가리킨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영주십경도에는 여러 점이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영주십경도」는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익태(李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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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열녀. 남편 오륭복이 몹쓸 병에 걸려 정성껏 간호했으나 위독하게 되어 자기 몸으로 대신할 것으로 하늘에 빌었다. 하지만 끝내 사망하므로 장사를 치른 다음에 식음을 전폐하며 여덟 살의 아이를 늙은 노비에게 맡기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1834년(순조 34)에 정표(旌表)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 2025-2번지[아란13길 57-49]에 ‘열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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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아버지는 오정규(吳挺奎), 어머니는 이여황(李如璜)의 딸이다. 1662년(현종 3년)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80년(숙종 6) 남인 일파가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허적(許積)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689년(숙종 15) 소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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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선비. 아버지는 오전(吳巓)이다. 집안이 가난하지만 배우기를 즐겼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1728], 정희량(鄭希亮)[?~1728], 박필현(朴弼顯 )[1680~1728] 등이 이른바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자 정의현을 중심으로 창의 격문을 삼읍(三邑)에 돌려 의병을 일으켰다가 진압 소식이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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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마을. 오드싱이오름 아래가 되므로 마을 이름이 오두싱이, 오디싱이가 되었다. 오드싱이오름 일대에 형성된 마을을 오싕이라 하고 한자 차용표기로 오등생촌(五等生村·吾等生村) 또는 오등생리(五等生里·吾等生里) 등으로 표기하였다. 1914년에 오등리가 되었다가 1955년에 시가 되면서 오등동의 관할이 되었다. 지형은 그리 높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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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에 있었던 포구. 왜포는 지금의 조천읍 신흥리에 있는 쉐물깍과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다. 왜포는 그 당시 왜포촌(倭浦村)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왜포촌은 지금 엉알개라는 하나의 포구만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오래지 않은 때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쉐물깍’을 포구로 이용하였다. 이렇게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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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와 종달리 사이에 있는 포구. 용항포는 지금의 구좌읍 하도리와 종달리 사이에 있는 신착개와 그 주변을 이른 말이다. 이 포구는 당시 용목잇개[龍項]라고 이르는 지경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며, 용목잇개는 용의 목과 같은 모양을 한 개[浦口]라는 데서 붙인 것이다. 『탐라순력도』의 별방조점(別防操點)에는 조선시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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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포구. 우두포는 지금의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펄낭과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며, 당시 우두곶(牛頭串)이라는 지경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망동산과 쉐머리코지, 그리고 연대를 그려 놓았다. 망동산과 쉐머리코지는 지금의 한경면 용수리에 있다. 우두포는 쉐머리코지에 의지하여 만든 포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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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송시열의 제주 유배 때의 행적을 기리는 비.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은 기사환국으로 1689년 3월 제주로 유배를 왔다가 달포 만에 다시 한양으로 불려 가던 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제주에 있으면서 『문의통고(問義通攷)』를 저술하고, 손자를 비롯하여 제주 유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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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에 있는 포구. 우지포는 지금의 한림읍 수원리의 외딴 자연마을인 용운동 해변에 있는 안개를 두고 이른 말이며, 당시 우지(牛池)라는 지형지물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잠수촌과 귀덕촌 사이에 우지포가 있다고 가록하고 있다.『탐라지』에서는 제주목 안에 있던 일곱 개의 우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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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있는 포구. 우포는 지금의 한경면 용수리 해변에 있는 부게원을 두고 이른 말이며, 어로 시설인 원이 들어서기 전에 이 포구를 어떻게 불렀는지를 알 수 없다. 우포는 당시 벗걸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이증은 우포를 대정현에서 대강을 붙일 수 있는 여섯 곳의 포구 중 하나라고 하였다. 이증은 이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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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조선 후기에 세워진 교육 기관. 조선 후기에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재생과 늠료를 두었다. 서당은 종래의 여러 교육 기관과 성격이 다르지만 교육 기관이라는 이유로 특권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권적인 보호는 특히 군역 면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우학당은 제주목 명월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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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에 있었던 포구. 원룡포는 지금의 한림읍 월령리에 있는 개창을 두고 이른 말이며, 당시 원룡(元龍)이라는 지경 이름 또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원룡포를 판포와 배령포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마을 이름인 한림읍 월령리의 월령과 원룡은 서로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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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 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석조 여래 좌상. 원명선원 석조 여래 좌상은 응회암으로 조성된 불상으로 18세기에 제작되었다. 좌상 형태의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나발(螺髮)을 제외하고 전체를 금빛으로 칠했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臺座)는 없다. 18세기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여래 좌상으로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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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 월영사에 있는 목조 불상. 1950년경 정용하가 남선사를 창건하면서 백양사에서 모셔와 봉안한 것이다. 이후 남선사가 폐사되면서 월영사의 전 주지인 설우가 월영사를 창건하면서 모셔왔다. 월영사 소장 목조여래좌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51㎝, 어깨 너비 22.5㎝, 상호 높이 18㎝이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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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1787년(정조 11)에 실시한 대윤차(大輪次: 과거에 떨어진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하던 시험)에서 표(表) 부분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문과의 초시·복시를 치루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얻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 식년시 문과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96년(정조 20) 4월 제주목사 이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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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승려. 유장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대흥사 승려로서, 억불 정책을 실시하던 조선시대에 수많은 청중을 감명시킨 대강백이었다. 유장이 대흥사에서 구례군의 화엄사로 자리를 옮겨 강석(講席)을 마련했을 때 1,500명의 청중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유장의 명성을 질시했던 전라도관찰사 조모(趙某)라는 자가 누명을 씌워 제주도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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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1696년(숙종 22) 10월 전라우수사 재임 중 이익태(李益泰)[1633~1704]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699(숙종 25)년 5월에 떠났다. 이때 함께 재임한 제주판관은 이석신(李碩臣), 정의현감은 신성원(愼聖源)·이한장(李漢章), 대정현감은 김경(金磬)·이만재(李萬材)[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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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민란(1813년)을 밀고한 무신. 1783년(정조 7) 이경철(李景喆) 등 17명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다. 1813년(순조 13) 양제해(梁濟海)가 아들 양일회(梁日會)와 윤광종·김지검(金之儉) 등과 함께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수령을 모해하고 민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윤광종이 이 사실을 제주목사 김수기(金守基)에게 밀고하여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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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치항(稚恒). 아버지는 유선(諭善) 윤득부(尹得孚), 어머니는 이보만(李普萬)의 딸이다. 1801년(순조 1)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홍문관교리를 거쳐 1811년(순조 1) 순흥부사에 임명되었다. 1612년(순조 12) 순흥부사를 사임한 이후 세자시강원의 필선·문학·사서 등을 지냈으며, 1815년(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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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3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윤구동(尹久東)의 공덕을 기리는 비. 윤구동은 문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15년(순조 15) 5월에 제주도에 부임하였다가 1817년(순조 17) 10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전출되었다. 재임 중 윤구동은 공피전(供彼錢) 1,800냥을 마련하여 다른 나라 배가 표도(漂到) 하였을 때 공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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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윤구동(尹久東)의 공덕을 기리는 비. 윤구동은 문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15년(순조 15) 5월에 부임하였다가 1817년(순조 17) 10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전출되었다. 재임 중 윤구동은 공피전(供彼錢) 1,800냥을 마련하여 다른 나라 배가 표도(漂到) 하였을 때 공궤(供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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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윤구동(尹久東)의 공덕을 기리는 비. 윤구동은 1815년(순조 15) 5월에 허명(許溟)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가 1817년 10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어 떠났다. 윤구동은 재임 중 공피전(供彼錢) 1,800냥을 준비, 공피창을 설치하여 이양선이 표류하여 왔을 때 민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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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백상(伯常), 호는 방한(方閒). 윤세수(尹世綏)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윤득민(得民), 어머니는 조정빈(趙鼎彬)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영조 32) 당론을 일으켰다고 탄핵을 받아 7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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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경차관을 지낸 문신이자 문인 화가. 본관은 파평. 자는 경도(景道), 호는 학산(鶴山)·찬하(餐霞). 아버지는 윤석복(尹錫復)이다. 1792년(정조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4년(정조 1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1801년(순조 1) 정언이 되었다. 1806년(순조 6) 김구주(金龜柱)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창원에 유배되었다. 18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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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원조가 쓴 글을 합본한 전집. 이원조(李源祚)[1792~1872]의 호는 응와(凝窩)로,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응와전집』에는 이원조의 글을 묶은 『응와문집(凝窩文集)』 22권, 『응와속집(凝窩續集)』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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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안핵겸찰리사로 파견된 문신. 1862년(철종 13) 10월 강제검(姜悌儉)[?~1863], 현재득(玄才得) 등이 제주에서 임술민란을 일으켜 부정한 아전의 죄를 들추어내고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웠다. 이에 조정에서는 1863년(철종 14) 1월에 이건필을 제주안핵겸찰리사(濟州按覈兼察理使)로 파견하였다. 이건필은 무고한 도민의 고충과 전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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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오(星五), 시호는 장희(莊僖). 아버지는 이면대(李勉大)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함경도의 단천부사, 경기도의 통진부사를 지냈고, 1881년(고종 18)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섬을 시찰하고 돌아와 울릉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경상도 병마절도사, 어영대장, 총융사를 역임하였다. 1884년(고종 21)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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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의 선비. 본관은 경주. 자는 온옥(昷玉), 호는 귤당(橘堂)이다. 아버지는 이계수(李繼秀)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하여 전통 유가의 환경에서 선비의 기질을 익혔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의 문하에서 유학의 진수를 익혔으며, 1873년(고종 10)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친하게 지내었다. 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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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하경(夏卿), 시호는 정희(貞僖). 아버지는 어영대장 이여발(李汝發)이다.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되어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693년(숙종 19) 4월에 윤정화(尹鼎和)[1648~?]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694년(숙종 20) 7월까지 재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경민편(警民編)』을 저술하여 도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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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관리. 1746년(영조 22) 3월 전라도 운봉현감에 부임하여 1748년(영조 25) 7월까지 재임하였다. 1763년(영조 39) 경기도 남양부사 재임 중 1763년 7월 이달(李鐽)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765년(영조 41) 6월까지 재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763년에 심래복의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 심래복[?~1763]은 조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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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1883년(고종 20) 선공감감역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8년(고종 25) 진해현감, 1889년(고종 26) 내금위장을 거쳐 1896년(고종 33) 평리원(平理院)이 개편된 뒤 고등재판소 검사, 법부 형사국장을 역임하였다. 1896년 지방 제도가 23부제로 개편된 뒤 제2대 제주부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896년 제주민란으로 면직된 오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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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명(系明), 호는 서봉(西峰), 시호는 충정(忠靖). 아버지는 연평부원군 이귀(李貴)[1557~1633]이며, 영의정 이시백(李時白)[1581~1660]의 아우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가담하여 정사공신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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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아버지는 이덕민(李德敏)이며, 평안북도 영변(寧邊)에서 태어났다. 1814년(순조 14)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829년(순조 29) 6월에 제주판관으로 부임하고 1831(순조 31)년 11월에 퇴임하였다. 제주판관 재임 중 청렴 근면하여 공사를 공명정대하게 집행하여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830년(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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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정(聖庭), 호는 녹하(麓下). 아버지는 이지응(李地膺)이다. 1809년(순조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0년(순조 30) 3월 이행교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32년(순조 32) 2월 파직되었다. 제주목사 재임 중 1831년(순조 31)에 화촌(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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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성광(聖光). 아버지는 이항조(李恒祚)이다. 1773년(영조 49)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791년(정조 15) 8월에 이홍운(李鴻運)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791년 8월에 바람이 세게 불어 흉년이 들었는데 조정에 청하여 7천 석을 구제미로 풀었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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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이원달을 기리는 비. 이원달은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37년(헌종 3) 11월에 부임하고, 1839년(헌종 5) 3월에 사직하였다. 재임 중 평역미(平役米) 4말에 4되를 감해주었고, 경민편(警民篇)을 인출(印出)하여 각 동리에 나누어주었는가 하면, 곡식이 기재된 장부를 샅샅이 조사하여 환곡의 폐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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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원달(李遠達)의 공덕을 기리는 비. 이원달은 문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37년(헌종 3) 11월에 부임하였다가 1839년(헌종 5)에 사직하였다. 재임 중 평역미(平役米) 4말에 4되를 감해주었고, 경민편(警民篇)을 인출(印出)하여 각 동리(洞里)에 나누어 주었다. 또한 곡식이 기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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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초명은 이영조(李永祚). 생부는 이형진(李亨鎭)이며, 양부는 이규진(李圭鎭)이다. 1809년(순조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재임 중 극에 달한 사족의 사치와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쇄신책 강구를 간하였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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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여주.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지완(李志完)[1575~1617]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 등을 거쳐 1647년(인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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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거(舜擧). 아버지는 이이정(李耳鼎)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22년(순조 22) 1월에 백영진(白泳鎭)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재임 중인 1822년 여름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죽은 자가 3천여 명이나 되자, 조정에서는 사헌부집의 조정화(趙庭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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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46년(헌종 12) 2월 권즉[1792~?]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848년(헌종 14) 3월까지 재임하였다. 1846년 제주 삼읍 원전(元田)의 세숙(稅菽)을 혁파하였다. 또한 남학당·서학당·우학당 등 세 학당을 혁파하였다. 목자(牧子)·방군(放軍)·기수(旗手) 등을 쇄신하였으며, 본영(本營)의 총수(銃手) 1천 2백 명을 따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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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의식(李宜植)의 선정을 기리는 비. 이의식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46년(헌종 12) 2월에 부임하였다가 1848년(헌종 14) 3월에 이임하였다. 이의식은 재임 중에 판관이었던 송익열(宋益烈)의 탐장(貪藏: 벼슬아치가 옳지 않은 짓을 하여 재물을 탐함)을 조정에 아뢰어 파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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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유(大裕). 아버지는 이돈형(李惇亨)이다. 1668년(현종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4년(현종 15) 5월 전라북도 용안현감에 부임하여 1675년(숙종 1) 12월 사임하였다. 1694년(숙종 20) 이기하(李基夏)[1646~1718]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696년(숙종 22) 9월에 물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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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 야계(冶溪) 이익태(李益泰)의 문집. 이익태가 제주목사를 제수받고 부임하기까지의 과정,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까지의 행적, 그리고 재임 기간 중의 업무와 제주 관련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 2018년 10월 30일 보물 제2002호로 지정되었다. 이익태는 『지영록』을 쓰게 된 연유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695년(숙종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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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익(汝翼). 아버지는 이상연(李尙淵)이다. 1700년(숙종 26) 춘당대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1704년(숙종 30)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며, 1709년(숙종 35) 임양군(臨陽君)이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710년(숙종 36) 사헌부헌납을 거쳐 다시 장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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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야수(野叟), 호는 소옹(蘇翁). 아버지는 이조참판 이상급(李尙伋)[1571~1637]이다. 1636년(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따라갔다. 1642년(인조 20) 예문관검열·예문관봉교·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1645년(인조 23) 세자시강원필선을 지냈다. 1646년(인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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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찰리겸위유어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신로(新老). 아버지는 판서 이문원(李文源)[1740~1794]이며, 어머니는 심숙(沈鏽)의 딸이다. 1809년(순조 9)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813년(순조 13)의 제주민란(일명 양제해의 난)으로 흩어진 민심을 위로하기 위하여 홍문관응교 이재수를 제주찰리사 겸 위유어사로 파견하였다. 18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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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2동 월정사에 있는 17세기 소조여래좌상. 월정사 소조여래좌상은 조선시대의 불상으로 2000년 12월 제주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소조여래좌상은 높이 59㎝, 너비 24.5㎝이고 흙으로 조성되었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 높직한 육계가 있고 상호는 원만하나 경직된 모습이다. 법의(法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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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776년(영조 52) 봉산군수를 거쳐 김해부사와 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봉산군수 재임 중 장령 유영진(柳榮鎭)[1723~?]은 이철운에 대해 “민생을 침학하여 자기 살찌우기를 마치 천성을 상실한 사람처럼 하므로,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지 않음이 없었다.”라는 이유로 벌을 내리라는 상소를 올렸다. 1792년(정조 16) 3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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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이최응(李最應)이 제주 지역에 쌓은 공덕을 기리는 비. 이최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서 쇄국 정책에 반대했으며,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었다. 이최응은 1877년(고종 14)과 1878년(고종 15)에 잇달아 흉년이 들자 임금에게 품신하여 호남사창미(湖南社倉米)를 제주도에 보내어 굶주린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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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두2동에 있는 포구. 이포는 지금의 제주시 도두2동에 있는 캐를 두고 이른 말이며,「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이포촌(泥浦村)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남사록』에서는 이을포라고 하였으며, 병선도 감출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제주삼현도」에서는 지금의 제주시 연동에 있는 문악과 임밀악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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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효자. 제주목 우면 입석촌(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대림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를 극진히 섬겼고, 아버지 이세훈(李世薰)의 제사를 정성을 다하여 올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살며 제사를 지냈다. 어머니가 생전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므로 죽은 후에도 쇠고기를 쓰지 않고 닭과 꿩고기를 썼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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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의 문인. 본관은 전주. 자는 차문(次文), 호는 매계(梅溪). 초명은 이한진(李漢震)이다. 아버지는 이신구(李信九)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 김덕하(金德河)의 딸이다. 아버지가 마을에서 서당을 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쉽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향시에 합격하여 여러 차례 전시에 응시하였으나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시골 선비가 급제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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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열녀. 효자 박계곤(朴繼崑)[1675~1731]의 딸이며, 이항춘(李恒春)과 혼인하였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게 되자 평생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그녀에게는 고소락(高所樂)이라는 몸종이 있었는데 주인의 정절에 감화하여 육십 평생을 시집가지 않고 주인을 섬기었다고 한다. 70세에 세상을 떠나니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정절부인이라 칭찬하고 그 절행을 천거하니, 17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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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 박씨 부인의 열행(烈行)을 기리는 비. 정려비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의 행동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려 주던 상이었다. 이항춘 처 박씨정려는 남편이 죽자 평생 동안 절개를 지키며 수절하다 죽은 박씨 부인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워 준 정려비였다. 박씨 부인은 조선 후기 제주목 엄장리에 살던 박계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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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27년(순조 27) 4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827년(순조 27) 8월 현명원(玄明圓)의 반역 사건으로 파직된 심영석(沈英錫)[1767~?]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30년(순조 30) 3월에 떠났다. 1827년 광양에 있는 제주향교가 사면이 바람을 받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옮겨 세우는 것을 추진하던 중 관노 고상신(高相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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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이행교를 기리는 비. 이행교는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27년(순조 27) 8월에 부임하고, 1830년(순조 30) 3월에 교체되었다. 제주향교를 서문 밖으로 이건하였고 삼성사(三姓祠)의 모흥단(毛興壇)과 전사청(典祀廳), 대일관(大一觀), 귤림서원(橘林書院), 박심당(博審堂), 삼초서당(三草書堂)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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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이행교를 기리는 비. 이행교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827년(순조 27) 8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에서 3년 정도 있으면서 이행교는 전임자인 심영석이 추진하던 제주향교 이전을 마무리 짓고 대일관과 홍화각 등을 중수하여 제주 지역의 사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판관 이의겸이 여색을 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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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1840년(헌종 6) 성균관 유생에게 황감(黃柑)을 주면서 치른 과거 시험인 황감제에서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문과의 초시와 복시를 치루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얻게 되었다. 1841년(헌종 7)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을 거쳐 승정원부승지를 지냈다. 1850년(철종 1) 6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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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현공(李玄功)의 선정을 기리는 비. 이현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여주목사를 지낸 뒤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현공은 1851년에 관덕정(觀德亭)을 중수(重修)하였고, 같은 해 제주향교(濟州鄕校)를 개축(改築)하였다. 서재(書齋)를 세워 제생(諸生)에게 늠료를 지급하여 숙식(宿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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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고, 아버지는 이주하(李柱厦)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후 제주의 전통 풍속을 개혁하여 유교화시키는 데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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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이형상을 기리는 비. 이형상 기념비는 1702년(숙종 18) 6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703년(숙종 29) 6월에 파직된 이형상(李衡祥)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제주에 부임했던 이형상은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하고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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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790년(정조 14) 7월 경상좌수사 재임 중 이철모(李喆模)[1732~?]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791년(정조 15) 7월에 사임하였다. 1793년(정조 17) 11월에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90년 7월 27일 유구국(琉球國)[일본 오키나와]의 배가 귀일포에 예고 없이 정박하였는데, 배에는 선원 12명이 있었으며 유구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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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방(子方). 아버지는 관찰사를 역임한 이창정(李昌庭)[1573~1625]이다. 1631년(인조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예문관대교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1612~1645]가 인질로 청나라에 갈 때 세자시강원의 사서로서 따라갔다.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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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시대 제주목사 이후현(李侯玄)의 추사비(追思碑). 비신의 너비는 44㎝이고 두께는 13㎝이며 높이는 83㎝이다. 비의 앞쪽 가운데에는“사상이후현공추사비(使相李侯玄功追思碑)”라 적혀 있고, 앞쪽 좌우로는 “백성들의 힘을 동원하지 않고 사우를 고쳐 세운다(不動民力 改建祠宇)”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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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대숙(大叔). 아버지는 이광하(李廣河)이다. 1702년 알성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1703년(숙종 29) 6월 이형상(李衡祥)[1653~1733]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애매헌(愛梅軒) 동쪽에 청심당(淸心堂)을 건립하였다. 청심당은 영조 때 세병헌(洗兵軒)이라고 불렸다. 또한 해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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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에 제주목사였던 이희태(李喜泰)가 관기 곤생(昆生)의 세 딸을 고문하여 죽인 사건. 제주목사였던 이희태의 첩은 서울에서 조카(혹은 전 부인의 아들)를 함께 데리고 제주목으로 왔는데 이희태는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관기인 곤생 모녀가 눈치 채고 그 사실을 발설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희태는 곤생 모녀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기생 몇 명이 사사로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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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풍천. 자는 숙빈(叔賓)이다. 아버지는 임섬(任暹)이며 어머니는 송필훈(宋必勳)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정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67년(영조 43) 정언 재임 중 언론의 중요성, 『어제유곤록(御製裕昆錄)』의 불합리한 서술, 재상의 잦은 교체, 제술(製述) 시험 때 성균관 유생을 모독한 도승지 송영중(宋瑩中)의 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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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풍천. 자는 성능(聖能), 호는 서재(西齋). 아버지는 집의 임형(任泂)이며, 어머니는 이의저(李義著)의 딸이다. 부인은 호조판서 김진구(金鎭龜)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임사화로 삭직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노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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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희명(希明). 아버지는 임현모(任賢模)이다. 1851년(철종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62년(철종 13) 2월에 신종익(申從翼)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임헌대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던 시기는 1862년(철종 13) 4월에 일어난 진주민란이 삼남 지방으로 확산되어 제주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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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임헌대(任憲大)를 기리는 비. 임헌대는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62년(철종 13) 2월에 부임하였다가 1863년(철종 14) 정월에 파직되었다. 임술민란(壬戌民亂)이 일어났을 때 축출당한 것이다. 민란 때 혹독한 곤욕을 치른 후 임헌대는 스스로 동헌(東軒)에서 물러나와 화북동 민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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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덕장(德章), 호는 죽실거사(竹室居士), 시호는 효정(孝貞). 아버지는 좌참찬에 추증된 임환(任喚)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감역 신방헌(申邦憲)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66년(헌종 7)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후 도원찰방·가례도감조관·성균관전적을 거쳐 현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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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 있는 포구. 입두포는 지금의 구좌읍 평대리 외딴 자연마을인 갯마리에 있는 물머리라는 포구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입두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입두촌이 끼어 있는 해변에 입두포가 있다고 하였다. 입두촌은 구좌읍 평대리 동쪽에 있는 자연마을인 갯마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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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에 있는 포구. 잠수포는 지금의 한림읍 수원리에 있는 물캐를 두고 이른 말이며,「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잠수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한림읍 수원리의 옛 이름이 물캐이다. 잠수포는 물캐의 뜻을 빌린 한자어이며, 물다는 잠기다[潛]의 뜻을 지닌 제주어이다. 포구 안에는 ‘물’이라는 우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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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48년(헌종 14) 3월 이의식(李宜植)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850년(철종 1) 6월에 사직하고 떠났다. 1848년 정의현감 강이진(姜履鎭)[1798~1865]과 수산진조방장 김기찬(金沂瓚)이 방두포 해변에 일본인 선장 다나카 등 5명이 정박하였다고 보고하자 사정을 묻고 감시하였다. 1848년 12월 산마감목관 김영초(金瀛礎)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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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장인식을 기리는 비. 장인식은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48년(헌종14) 3월에 부임하고 1850년(철종 1) 6월에 사직하였다. 양몽재(養蒙齋)를 세워서 서책을 마련해 두었고, 문과초시(文科初試)를 설행하였다. 금종각(金鍾閣)을 갖추고 군기를 보충하여 갖추었으며 새로 서원의 산앙문(山仰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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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장인식을 기리는 비. 장인식은 양몽재(養蒙齋)를 세워서 서책을 마련해 두었고 문과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금종각(金鍾閣)을 갖추고 군기를 보충하여 갖추었으며, 새로 서원의 산앙문(山仰門)을 세웠다. 삼성사(三性祠)에 숭보당(崇報堂), 북재양(北財場)에 심고당(審固堂)을 세웠고, 귤림서원(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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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차지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장인식(張寅植)의 선정을 기리는 비. 장인식은 1848년 3월에 부임하였다가 1850년 6월에 사임(辞任)한 제주목사이다. 장인식은 2년 3개월간 재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삼성사 내에 숭보당(崇報堂)을 세웠으며 배대정(拝待亭)을 해수사(海袖祠)로 개편(改編)하여 해신제(海神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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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정현감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녹담(鹿潭). 아버지는 이차방(李次房)이다. 1770년(영조 46) 향시에 합격하고 대과에 응시하려 출항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유구(琉球)[일본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하였다. 온갖 고생 끝에 1771년(영조 47) 2월에 서울에 도착하여 식년시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자 5월 8일 귀향하여 『표해록(漂海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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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장한철(張漢喆)이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귀국한 경험을 쓴 표류기.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난 장한철은 1770년 12월 25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류쿠제도(琉球諸島)[오키나와]에 표착을 한다. 『표해록』은 장한철이 류큐제도에 표착한 뒤 일본으로 가는 상선을 만나 구조된 뒤, 우여곡절 끝에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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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도에 유배된 무신.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사역원부공사 장경이며, 역관 장현(張炫)의 종질이다. 숙종의 비이고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오빠이다.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포도대장격인 금군별장이 되었다가 1692년(숙종 18) 총융사로 승진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희빈 장씨와 함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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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열녀. 남편 전형원(田衡元)이 병들어 밤낮으로 간호하며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었지만 끝내 남편은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죽자 성복(成服: 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것)한 후에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자결하였다. 남편과 같이 장사를 치러 주었으며, 1814년(순조 14) 정표(旌表)되었다. 1814년(순조 14)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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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본관은 연일. 자는 봉수(鳳叟). 아버지는 정태락(鄭台樂)이다. 1863년(철종 14) 1월 임헌대(任憲大)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그가 제주에 부임하였을 때 강제검(姜悌儉) 등이 주도하는 민란군이 제주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임 제주목사가 부임하자 강제검은 180명이 연서한 교폐절목(矯弊節目)을 제시하면서 시행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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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정기원(鄭岐遠)을 기리는 비. 정기원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63년(철종 14) 정월에 부임하였으나, 1864년(고종 1)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 중 임술민란(壬戌民亂)을 일으킨 강제검(姜悌儉), 김흥채(金興采) 등을 체포하여 사형시켰고, 평역미(平役米)를 감면하여 금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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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임종(林宗), 호는 오헌(迃軒). 아버지는 참봉 정운서(鄭雲瑞), 어머니는 이정흥(李鼎興)의 딸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721년(경종 1)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에 들어갔고, 1726년(영조 2) 예조좌랑에 올랐다. 예조좌랑 재임 중 강원도 일대 국릉(國陵)의 관리 상태를 살폈는데, 제대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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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아버지는 정석록(鄭錫祿)이며 제주목 좌면(左面) 도려(道廬)[현 상도]에서 태어났다. 1794년(정조 18) 4월 심낙수(沈樂洙)[1739~1799]가 제주위유안핵순무시재어사 (濟州慰諭按覈巡撫試才御使)로 부임하여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였다. 이때 시제(詩題) 「노인송(老人頌)」에 대해 글을 지어 송(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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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순조 13) 제주도에서 양제해가 일으킨 민란. 1813년(순조 13) 제주도 백성들에게 부과된 부역이 너무 과중해지자 양제해가 김익강·고덕호·강필방 등과 함께 거병을 모의하였다. 이때 사람을 모으고 병기를 만들어 제주성과 정의·대정에서 거병하기로 뜻을 모았다. 양제해는 제주 영읍의 네 관원을 죽이고, 섬 전체를 장악한 후 배가 육지로 못 나가도록 한 뒤, 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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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철종 13) 9~11월 세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서 조세 폐단과 탐관오리의 처단을 요구하며 일으킨 민란. 감관(監官)이란 조선시대 각 관아나 궁방에서 금전 출납을 맡아보거나 중앙 정부를 대신하여 특정 업무의 진행을 감독하던 관직이었다. 이러한 감관의 자리는 항시 불안한 것이었고 신분상에 있어서도 미천하였으므로, 감관은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합법적·비합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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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2월에서 1884년 10월 사이 제주목에서 조정에 보고한 계문을 비변사(의정부)에서 옮겨 기록한 자료집. 본서의 저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이다. 5책으로, 대략 크기는 42×30㎝로 대소부동하다. 전체 분량의 절반을 번역한 번역본이 같은 이름으로 나와 있다. 각 책의 수록 연대를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제5책은 1846년 2월부터 1858년 9월까지, 제1책은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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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철종 14) 3월에 작성한 1862년에 발생한 제주민란에 대한 죄인 심문 기록. 1862년(철종 13) 2월 임술(壬戌)년에 제주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부호군(副護軍) 이건필(李建弼)을 안핵겸찰리사로 파견하였는데, 그때 사건 전말을 공초(供招)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 등록은 철종 13년(1862) 2월에 임헌대(任憲大) 제주목사가 부임하였는데 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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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제주시청에 있는 17세기 후반인 조선 숙종(肅宗)[1661~1720] 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지역 속오군의 소속과 신원을 적어 놓은 명부. 속오군은 조선 후기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편성된 예비군 조직인 지방 군대이며 속오군적부는 지금의 병적기록부와 같은 속오군의 명부 자료이다. 『제주속오군적부』는 화첩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보물 제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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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 작성된 제주목의 읍지. 18세기 후반 관찬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제주목의 읍지로 사회·경제·군사·재정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앞 부분의 연혁은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를 토대로 기술되었고, 필사본이다. 사찬(私撰)인 『탐라지(耽羅誌)』보다 훨씬 규식에 입각하여 제주의 특색을 드러내는 부분은 줄었으며, 항목만 설정된 경우도 있는 데서 저본들은 관찬(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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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지역에서 작성된 고문서. 『제주하원리호적중초』는 하원리에 있는 고문서 중의 일부로서, 호주를 중심으로 그 호의 구성원에 대한 사항을 기록한 호적 대장을 작성하기 위한 초본이었다. 기재 양식은 지역명, 작통의 차례, 통수(統首)의 직책, 편호의 차례, 주호와 협호의 차례로 이루어져 있다. 주호는 직책, 혹은 신분·성명·나이·본관을 기입한 후 삼대의 성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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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도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양주.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悔軒).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조태채(趙泰采)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 부사(府使) 심익선(沈益善)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715년(숙종 41) 검열이 되었다. 1716년(숙종 42) 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고 수찬·정언·부교리·교리·헌납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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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 지역에서 주장(主將)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한 종9품 관직. 조방장(助防將)은 제주진관 소속 9개 방호소 가운데 명월방호소를 제외한 방호소의 책임자로 모두 8명이었다. 조선 전기 방호소의 책임자는 여수(旅帥)였으며, 변란이 생길 경우 영군관이 파견되어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는 각 방호소에 성을 쌓았으며, 조방장을 파견하여 방어에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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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2동에 있는 포구. 조부포는 지금의 제주시 외도2동인 연대동이라는 자연마을에 있는 듬북개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듬북개내창 하류에 조부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시 외도2동은 월대동과 연대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연대동에는 조부연대가 있다. 마을 이름은 연대에 맞추고, 연대의 이름은 이 마을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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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양주. 자는 성경(成卿)·태성(台城), 호는 정헌(靜軒)·대릉(大陵). 우의정 조태채(趙泰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조겸빈(趙謙彬),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趙榮順)이며, 어머니는 김시눌(金時訥)의 딸이다. 부인은 홍지해(洪趾海)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별검(別檢)이 되었다. 1777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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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민가(民家).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고관사 버류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서울슈퍼 오른쪽으로 100여 m를 가면 길 왼쪽 방향에 있다. 황인관 가옥은 안거리 4칸, 밖거리 3칸, 목거리 4칸의 기와집이다. 삼각형 대지의 중심에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안거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안거리 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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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었던 포구. 조천포는 지금의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개낭개와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며,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조천관리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남사록』에서는 조천관포라고 하였으며, 조천방호소 소속 전선 1척과 함께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제주삼현도」에서는 조천관리 앞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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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조희순(趙羲純)의 향교 중수를 기리는 비. 조희순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68년(고종 5) 10월에 부임하였다가 1872년(고종 9) 5월에 교체되었다. 조정에 요청하여 진휼(賑恤)을 베풀었고 군기의 보수, 남북 수구의 홍예(虹霓)를 수치(修治)하였으며, 성상(城上)에 격대(擊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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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조희순(趙羲純)의 공덕을 기리는 비. 조희순은 제주도에 부임하기 전 죽산부사(竹山府使)를 거쳐 1868년(고종 5) 8월 20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전임(轉任)한 이후선(李後善)의 뒤를 이어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임명되어, 그 해 10월에 부임하였다. 제주도에 있는 삼읍의 서원과 사당을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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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있었던 포구. 종달포는 지금의 구좌읍 종달리의 소금밧과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며,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종달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종달촌 앞에 종달포가 있다고 하였다. 종달촌은 이웃 역석촌과 함께 깊게 후미진 만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확인이 되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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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 있는 포구. 좌가마포는 지금의 구좌읍 한동리에 있는 더럭물개와 반착갯담을 두고 이른 말이며, 『제주읍지』에 나와 있는 좌가마장(佐可馬場)이라는 지경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남사록』에서는 좌그맛개 또는 좌가맛개 등으로 기록되었고 「제주삼현도」에서는 마장 동쪽에 좌가마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좌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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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조선 시대 누각. 좌연각은 『탐라지(耽羅誌)』에 “재연무정지북(在演武亭之北)”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연무정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인 1848년(헌종 14)에 판관 탁종술이 세웠고, 액자는 김정희가 썼다. 좌연각이 있던 자리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제주동초등학교 북편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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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사설 교육 기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으로 재생(齋生)과 늠료(廩料)를 두었다. 서당은 종래의 여러 교육 기관과 성격이 다르지만 교육 기관이라는 이유로 특권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권적인 보호는 특히 군역 면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좌학당의 위치는 제주목 세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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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승려. 휘(諱)는 지안(志安), 자는 삼낙(三諾), 호는 환성(喚惺)이다. 고향은 춘천이며, 속성은 정씨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상봉대사(霜峰大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17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월담화상(月潭和尙)에게서 법을 이어받았다. 청허(淸虛) 휴정(休靜)의 5세 적손이다. 세수 66세, 법랍 51세로 입적하였다. 1690년(숙종 16) 지안은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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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의 명의(名醫). 자는 중서(仲舒), 호는 순암(順菴)·월계(月溪). 일명 진좌수라고도 한다. 제주도 입도조 진계백(秦季伯)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진정적(秦廷績)이다. 전설에 따르면, 진국태가 다른 마을로 글공부를 하러 밤에 다니게 되었는데, 여인이 항상 나타나 구슬을 입에 물고 서로 입으로 넘겨주며 놀게 되었다. 여인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그대로 했더니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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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지역에서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두었던 제도. 진휼곡은 춘궁기에 종곡(種穀)을 나누어주고 추수기에 거두어들이던 곡식 또는 제도를 일컫는다. 진휼곡은 1668년(헌종 9) 제주목사 이인(李寅)에 의해 설치되었는데, 진대구휼(賑貸救恤)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거듭된 자연재해로 원곡(元穀)이 줄어드는 결과가 초래되어 운영에 어려움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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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판관·대정군수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강. 자는 대여(大汝), 호는 초은(樵隱). 일명 채두석(蔡斗錫)이라도 한다. 아버지는 채종관(蔡宗寬)이며 어머니는 홍씨이다. 1893년(고종 30) 11월 김응우(金膺友)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하고, 1895년(고종 32) 1월 15일 대정군수로 전임되었다. 1896년(고종 33) 3월 강유석(姜瑜奭)·송계홍(宋啓弘)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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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순녀(順汝). 아버지는 포도대장 채학승(蔡學承)이다. 음보(蔭補)로 무관직에 기용되어 내외 관직을 거쳤다. 1855년(철종 6) 8월 목인배(睦仁培)[1794~?]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856년(철종 7) 봄에 귤림서원(橘林書院) 모현암(慕賢岩) 편액을 썼고, 제주성 동성문(東城門)에 있는 연상루(延祥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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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북수구성 위에 있던 조선 시대 누정. 천일정은 1847년(헌종 13) 제주목사 이의식이 북수구성을 성 밖으로 늘여 쌓고 그 위에 세운 누정이다. 비바람으로 무너졌다. 사라진 북성의 자취와 함께 천일정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제주성 주변에 있던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자료를 모아 제주성의 옛 모습을 복원한다면 역사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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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김정희를 방문하여 6개월 간 체류한 승려. 1786년 4월 5일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득도하고, 대흥사에서 민호(玟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일지암에서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정약용·김정희·신위 등과 교분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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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로 유배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초명은 최기남(崔奇男)이다. 아버지는 최대(崔岱)이며,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1855년(철종 6년) 유학(幼學)으로 도기과(到記科: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식년 문과 초시)에 강(講)이 뛰어나 문과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얻어 그 해 정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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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자중(子重). 아버지는 최동립(崔東岦)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54년(효종 5)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조좌랑 재임 중인 1665년(현종 6) 6월에 제주판관에 부임하여 당시 가락천 동쪽에 있었던 충암묘(沖庵廟)를 장수당(藏修堂) 남쪽으로 옮기고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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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정의 행적을 기리는 비. 김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때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와 함께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을 시행하는 일 등에 힘썼으나 기묘사화 때 제주로 귀양 왔다가 1520년 사사되었다. 충암 김선생 적려유허비는 김정의 사후 3백여 년 뒤인 1852년에 세운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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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원조(李源祚)가 남긴 제주 관련 문헌. 『탐라계록(耽羅啓錄)』은 제주목사로 있던 이원조가 내치(內治)의 중요함에 대하여 전라도관찰사 등에게 계품(啓禀), 계문(啓聞)한 것으로서 관청 공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탐라계록』은 퇴계학파제현집(退溪學派諸賢集) 편찬 사업으로 간행된 『응와전집(凝窩全集)』 전 4권 중 네 번째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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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제주목에서 작성한 제주목 관아 시설 배치 상황 등이 나와 있는 지방 관찬문서. 편자 및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뒷표지 뒷면에 ‘제주 탐라방영총람 관덕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제주목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수령을 보좌하는 육방 관속이 작성하여 신임 수령이 부임해 왔을 때, 해당 사항별로 수령에게 설명하거나 혹은 수령이 소속 읍을 순행할 당시에 향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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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목사 정언유가 제주의 삶과 풍물을 담아 지은 기행 가사(紀行歌辭). 「탐라별곡」은 정언유가 영해부사를 끝내고 1749년(영조 25)부터 2년 동안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제주의 자연과 제주인의 삶을 담아 지은 국문 가사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연 예찬과 연군의 정을 표현하던 전기 가사의 전통을 잇되, 제주의 역사적 삶과 백성들의 현실적 삶을 보탠 조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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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정조 18)에 제주도에서 시행한 문·무 양과의 급제자 명단과 과문을 모아 규장각에서 간행한 책. 1794년(정조 18) 제주 유생에게 문과시(文科試)를 치러 합격한 사람들의 글을 기록한 책을 내게 하여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이라 하였다. 규장각에서 편집했으며 1책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윤음(綸音)」, 「장계(狀啓)」, 「방목(榜目)」, 「과문(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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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의 통수권을 상징하는 군기(軍旗). 탐라제군사명기는 세로로 긴 종장 대기면서 군기에 속하며, 군기는 글자 그대로 군대에서 쓰는 기인데 제주목사로 도임할 때부터 사용하였다. 기는 교지와 함께 받아 부임시 사용하고, 위정(爲政)시 제주목사와 함께 하여 제주목사의 존재와 위엄을 표시하였다. 『탐라순력도』에서 보면 제주목사는 행렬시 주로 가마를 타고 가며 기(旗)는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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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숙종 때 제작된 제주도 지도와 그 서문. 1709년(숙종 35)에 제주목사 이규성(李奎成)이 제작한 지도 1과 병서 2로 이루어진 지도로, 세로 125㎝, 가로 98㎝의 크기이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의 제주 지도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1년 6월 4일 제주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도의 서문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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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판포리에 있는 포구. 판포는 지금의 한경면 판포리에 있는 엄수개를 두고 이른 말인데,「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판포리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제주삼현도」에서는 판포리 앞에 판포가 있다고 하였으며, 판포리는 널개라는 마을 이름의 한자 차용 표기다. 널개는 한경면 판포리의 옛 이름이다. 『판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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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에 표착한 네덜란드 선원. 1652년 네덜란드를 출발,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와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1653년(효종 4) 8월 일행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과 그 일행은 1654년(효종 5) 5월 서울로 압송되었고, 1665년(현종 6) 3월에 전라남도 작천병영(鵲川兵營)으로 이송,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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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27년(순조 27)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1832년(순조 32) 2월 이예연(李禮延)[1767~1843]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34년(순조 34) 7월에 떠났다. 이후 1836년(헌종 2)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제주목사에 재임하던 1832년 연희각 동남쪽에 공제당(共濟堂)을 중수하여 군관(軍官)의 거주처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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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2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한응호(韓應浩)의 공덕을 기리는 비. 한응호는 1803년(순조 3)에 공제당(共濟堂)을 상아 동쪽에 세워 군관 집무소로 사용케 하였다. 1834년(순조 34) 봄에는 남학당과 서학당을 각각 건립하였다. 한응호는 1834년(순조 34) 가을, 제주도에 기근이 들자 곡식 600여 석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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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있었던 포구. 함덕포는 그 당시 함덕리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이 포구를 두고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과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서는 함덕포(咸德浦), 그리고 「제주삼읍도총지도」에서는 강림포(江臨浦)라고 하였다. 강림포는 강녕개의 한자어다. 지금 조천읍 함덕리 2구에는 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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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제당. 해신사는 조선 순조 20년(1820), 당시 제주목사로 있던 한상묵이 화북포 앞바다를 오고가는 배들의 안전을 바다의 신인 용왕에게 기원하기 위해 지은 제당이다. 해신사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5일 바다가 삶의 터전인 주민들이 모여 ‘해신제’를 지내는데, 무속신인 용왕에게 유교식 마을 제사를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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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향사당은 봄과 가을에 고을 사람들이 모여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향사당(鄕社堂)의 원래 이름은 향사당(鄕射堂)이었다. 여기서 ‘사(射)’는 공자가 “확상(矍相)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을 얻는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즉 옛날 어진 임금들이 몸소 인의(仁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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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던 조선 시대 사당. 향현사는 1843년(헌종 9) 제주목사 이원조가 조선조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공(靈谷公) 고득종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849년(헌종 15)에 김진용을 추향하기도 했으나, 1871년(고종 8)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유허비가 현재 오현단에 남아 있는데, “고경준지(高景晙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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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남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허명(許溟)의 선정을 기리는 비. 허명은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수기가 파직되자 후임으로 1814년(순조 14) 4월에 부임하여 1815년(순조 15) 5월에 이임하였다. 1814년(순조 14)에 허명은 해녀들이 미역을 캐는 데 따른 수세(水稅)를 없애고 돈 900냥을 준비하여 공용에 보태 쓰도록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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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에 있는 포구. 협재포는 지금의 한림읍 협재리에 있는 큰개창과 족은개창을 두고 이른 말이며,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협재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협재포의 기본 틀은 1960년대 이루어졌다. 작은고자여와 병풍석을 끼고 호안 80m가 축조되었다. 맞은편 가름성창의 선착장 30m도 이 때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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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로 유배된 조정철을 변호하다 죽은 여인. 본관은 남양. 일명 홍랑(洪娘)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향리를 지낸 홍처훈(洪處勳)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777년(정조 1) 9월 11일 노론 벽파에 속하였던 조정철(趙貞喆)이 제주로 유배되어 제주성 안에 있던 신호(申好)의 집에 귀양지를 마련하였다. 홍윤애는 조정철의 귀양지를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고, 1781년(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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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유배된 선비 조정철(趙貞喆)을 위하여 순절한 홍윤애의 무덤 터. 조정철을 극진히 사랑했던 홍윤애는 연인의 죄를 추궁하는 제주목사의 가혹한 고문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연인의 생명을 구해냈다. 그로부터 30년 뒤(1811)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손수 이 무덤을 단장하고 애절한 시비를 세웠다. 1940년 무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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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수백(綏伯). 아버지는 홍계택(洪啓澤)이며,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765년(영조 41)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을 거쳐 1793년(정조 17) 5월 이휘조(李徽祚)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하였으며 1795년(정조 19) 9월에 물러났다. 홍이조가 부임할 때 사헌부장령 강봉서(姜鳳瑞)[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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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정의현감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홍범철(洪範喆)이며, 제주목 신촌에서 태어났다. 이우식(李友植)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부임하였다. 1898년(고종 35) 1월 방성칠(房星七)[1849~1898]이 화전세(火田稅)·장세(場稅)·호포(戶布)의 과다 징수와 환곡의 임의 징수 등의 폐단을 바로잡겠다고 1898년 제주민란(일명 무술 민요)을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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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남양. 자는 성소(聲簫), 호는 우정(羽亭). 아버지는 도사(都使)를 역임한 홍재원(洪在源)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공부한 후 1890년(고종 27)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93년(고종 30) 7월 파리를 떠나 귀국하던 길에 도쿄에 머물면서 이일직(李逸稙)을 만나 김옥균(金玉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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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범(聖範). 아버지는 홍만운(洪萬運)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4년(숙종 20)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재임 중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된 장희재(張希載)[?~1701]의 일을 거론하다가 교체되었으며, 1709년(숙종 35)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716년(숙종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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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석여(錫餘), 호는 오천(梧泉), 초명은 중흠(重欽), 시호는 양효(良孝). 아버지는 형조판서 홍만조(洪萬朝)[1645~1725]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7월 병조정랑에서 경기도 마전군수로 전출되었고, 1728년(영조 4)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738년(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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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731년(영조 7) 개천군수를 지냈으며, 1738년(영조 14) 부령부사 재임 중 정사를 잘 돌보아 영조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전라우수사 재임 중인 1754년(영조 30) 10월 김몽규(金夢煃)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756년(영조 32) 9월에 떠났다. 1755년(영조 31) 제주에 보리 흉년이 들어 가을에 기근이 있자 조정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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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9개 진(鎭)의 외곽을 빙 둘러서 축조한 성곽 중 조천진에 축조한 성곽. 화북포는 조선 시대 제주 지역의 대표적인 수전소로 방어의 요새였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화북포에는 판옥전선이 중부, 좌부, 우부에 각각 1척씩 있다. 또한 비상 양곡이 6석, 격군이 180명, 사포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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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진영 터. 화북진지는 조선 시대 제주도의 군사적 방어 시설인 화북진이 설치되어 있던 자리이다. 진(鎭)은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 관제의 하나로 진영의 줄임말이다. 화북진의 서북쪽에는 제주목사 김정이 방파제를 쌓았다는 화북포구와 김정의 공적비가 있으며, 방파제와 연접한 공지에는 해신에게 바다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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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지역에서 화전(火田)에 징수하던 조세. 화전은 산골짜기의 궁핍한 주민들이 주인 없는 산에 불을 질러서 밭으로 만들어 곡식을 재배하던 농경법이다. 화전세는 이러한 밭에 징수하던 조세이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일찍부터 재앙의 섬, 천형(天刑)의 땅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층은 현무암층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표토도 화산회토가 덮여 있어서 농사에 부적합한 토양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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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제주에서 진상한 귤을 나누어주고 치르게 했던 과거 제도. 조선 시대 제주에서 진상한 귤을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시험은 주로 감귤이 진상되는 10~2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 예로부터 제주목에서는 귤·유자·귤감을 진상해왔다. 그러면 종묘에 진상하고 각궁의 하인들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에게 이를 바쳤는데, 이를 치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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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어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황건(黃鍵)이며, 어머니는 이문행(李文行)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2년(숙종 38) 지평·사서를 지냈으며, 1713(숙종 39) 정언·부수찬·수찬을 거쳐 1716년(숙종 42) 교리를 지냈다. 교리 재임 중인 1716년 1월에 제주별견어사로 파견되어 여러 해 동안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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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찰리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숙(英叔). 아버지는 황종창(黃鍾昌)이며, 황종림(黃鍾林)에게 입양되었다. 경기도 과천(果川)에서 태어났다. 1873년(고종 10)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수찬에 임명되었다. 그 뒤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1888년(고종 25) 대사성이 되었다. 1888년 함경도 영흥부민들이 환전(還錢)의 고통을 견디다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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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양백(良伯). 아버지는 황수태(黃壽泰)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735년(영조 11)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3월 유혁(柳爀)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778년(정조 2) 12월에 떠났다. 함께 재임한 제주판관은 김광현(金光鉉)[1722~?], 경내운(慶來運)[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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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제주도 내 효자, 효부, 열녀, 의사의 행적을 모아 엮은 책. 『효열록』은 조선 시대 제주도 내 효자 26인, 효부 6인, 열녀 27인, 의사 3인의 순서로 합계 62인의 행적을 모아 엮은 책이다. 1834년(순조 34) 정월에 제주 목사 한응호(韓應浩)의 지시를 받아 김영락(金英樂)[1789~1859]이 어사들이 조정에 올린 장계 초록(狀啓草錄)과 면리(面里)에서 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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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회천동에 있는 마을. 세는 는세 또는 세미(가는 샘)의 변음으로, 회천동의 동회천에 있는 샘의 이름이었다. 이 샘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한자 차용표기로 세은쇄촌으로 표기하였다. 오늘날은 회천동의 서회천이라 하고 있다. 17세기 고지도에 세은쇄촌(細隱刷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