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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이자 의병장. 본관은 청주. 자는 원약(元躍). 고조부는 현감 고덕수(高德秀), 아버지는 판결사 고준(高遵)이다. 동생으로 고응섭(高應涉)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내금위장으로 있던 아우 고응섭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조령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고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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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재학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장터에서 김을경, 이중곤, 추성렬, 이교필, 이용호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동하였다. 권재학은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소이면사무소로 달려가 만세 삼창을 하였다. 이때 왜경이 김을경, 이중곤을 연행하자 주재소에 가서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음성에 거주하던 일본인 후루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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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항일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경(德卿), 호는 우춘(又春)이다. 참판 김낙회(金樂會)의 손자이며, 참판 김태희(金泰熙)의 아들이다. 사천현감을 역임하던 중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었다. 김기명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간 통곡하였고 열흘이 지나도록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깊은 골짜기에서 태어나 충(忠)을 본받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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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동환은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여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당시 20세였던 김동환은 3월 20일에 맹동면 주민 수백 명이 만세 삼창을 하며 시위를 하자, 천도교의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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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태어나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윤규섭, 유근배, 남상엽, 최규동 등과 흑민단(黑民團)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흑민단의 주요 활동은 배일사상 고취와 선전, 독립자금 모금, 중국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 등이었다. 그러던 중 1942년 만주에서 유근배가 윤규섭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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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148번지에서 김수홍(金壽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충청북도 음성읍 초천리에 있는 백양서당(栢陽書堂)에 다니던 정문영, 정대영, 최만득 등과 음성 장날에 맞춰 시위를 벌였고, 3월 28일에도 음성시장에서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밤 산 위에서 약 5백여 명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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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장. 1905년 을사륵약이 체결되자 가산을 팔고 의병을 모집하여 1906년 3월경에 이교율(李敎律) 등 2인과 같이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귀흥리에 이르렀다. 이미 해가 졌는데 마침 일본 수비대 10여 명이 귀흥리 어느 집에 투숙한 것을 탐지하였다. 동행한 사람들과 밀의하고 심야에 적 보초병을 돌로 타살하고 무기를 탈취한 후 일본 병사 숙소에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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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김원조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왜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군정부 광복군에서 활약하였으며,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서울에 연락 기관을 설치하고 동지들과 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 경기도 이천에 돌아와 활약하다가 12월 28일 왜경에 체포되어 예심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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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을경은 1919년 당시 21세였다. 4월 1일 이중곤 등과 함께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만세를 삼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군중을 선도하여 소이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면장인 민동식도 시위에 가담하게 하였다. 5월 22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였다. 김을경은 67세에 사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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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자는 성원(聖遠).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의 13세손이다. 1882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김석용(金奭容)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김필제는 한일합병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의거 활동을 하다가 왜경에게 쫓기게 되었다. 이때 왜경이 난사한 총탄에 오른팔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서재필 박사의 도움으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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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경성부 수하정보통학교의 소사로 있던 당시 26세 서대순(徐大順)의 협조를 얻어 배운성과 함께 1919년 4월부터 10월까지 은밀히 독립운동 목적을 기재한 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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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3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노래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윤원(南允源)이다.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윤규섭·유근배·최규동 등과 흑민단(黑民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2년 체포되어 대전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약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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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호중(南鎬重)이다. 천도교 음성교구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23년 종리원(宗理院) 종리사에 임명되었고, 교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금한 쌀을 천도교 중앙회에 보내는 직책을 맡았는데, 그 쌀이 독립군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면서 1925년 7월 일본 경찰에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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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제성(朴濟成)[1902~1970]은 박서 장군의 21세 손이고 박중현(朴中鉉)의 아들로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2일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민병철, 박영록 등과 만세 시위를 계획, 추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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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백거(伯擧). 증조는 현감 반석권(潘碩權), 아버지는 반인후(潘仁後)이다. 부인은 천안전씨로 전욱(全郁)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반인후(潘仁後)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왜적과 싸우다가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지자 아버지를 업고 적의 포위를 뚫고 나왔다. 충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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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신억검(申億劍)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한내 장날을 이용하여 김을곤(金乙坤), 이교필(李敎弼), 추성렬(秋成烈)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수천의 시위 군중은 이들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흥분한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해졌다. 같은 날 오후 3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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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7천 석 지기 갑부로 독립운동을 하던 신조준의 딸로 출생하였으며, 선천보성여학교 2학년 때 권고퇴학을 당하고 교회 어른들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장현근과 19세에 결혼하였다. 결혼 1주일 만에 남편이 사라져 수소문 끝에 여운형의 소개를 받고 신의주에서 만주로 가려다가 안창호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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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죽산공립보통학교에서 양재옥(梁在玉) 등과 함께 학생 50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고, 1919년 4월 2일 전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안성군 죽산 지방의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동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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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안창렬은 1919년 4월 1일 김을경, 이중곤, 권재학, 추성렬, 이교필, 이용호 등이 주도하는 한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 운동이 진행되던 중 군중이 던진 돌에 주재소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사태가 위급해지자 충주수비대가 파견되었고, 이들의 무자비한 발포로 임신부를 비롯하여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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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2월 1일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1920년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 편성 때 독립군사령부 조직책으로 활동하고, 1924년 길림성에서 독립군 재건에 활약하며 자유 독립 사상을 고취한 「자유가(自由歌)」를 작사, 작곡하였다. 1924년 길림성에서 독립군 재건에 활약하고, 1930년 한족자치연합회와 생육사(生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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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1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청(柳淸)이다. 1934년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41년 윤규섭과 모의하여 남상엽·김시중·최규동 등을 규합한 뒤 흑민단이란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흑민단을 통하여 배일사상을 선동·선전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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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김을경(金乙卿), 이중곤(李重坤), 권재학(權在學) 등 6명이 주동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에 앞장서서 만세 시위를 더욱 가열시켰다. 김을경, 이중곤 등 주동자가 연행되어 소이주재소에 감금되자 격분한 군중은 주동자를 석방하라고 주재소를 포위하고,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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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28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로 이사 와서,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하고, 서울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동경 일본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 제2차 세계대전 수행을 위하여 동원령을 공포하고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 출신 대학생들을 학도병으로 동원시키기 시작하자, 이에 반대하여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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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경춘(慶春), 호는 추암(棷庵). 충효공 윤환(尹桓) 후손이다. 윤병의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 노역(勞役)으로 20세에 이르러 이항로(李恒老)와 유중교(柳重敎) 두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894년 갑오개혁에 통분하다가 외세를 물리칠 것을 다짐했으며, 1895년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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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성언(聖言), 호는 일와(一窩). 할아버지는 의병 윤병의(尹秉義)이다. 윤정학은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서 출생하였다. 유인석(柳麟錫) 문인으로, 고종 때 진사가 되었다. 1895년과 이듬해에 의병이 되어 스승 유인석, 조부 윤병의와 의거에 가담하여 충주와 제천 싸움에 참여하였다. 충주 싸움에서 패한 뒤 물러나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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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교필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봉전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주재소를 습격하고 구금자를 탈환하고자 절규하면서 귀가하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등 누구보다도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6개월을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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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0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내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서 임백규(林百奎), 유해길 등과 주동이 되어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4월 2일 약 6백 명 면민이 각 동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천평리 배미에서 임백규, 유해길과 역사적인 거사를 단행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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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성용은 1875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에서 이호성(李鎬聖)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 자는 덕경(德敬)이다. 1919년 4월 2일 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 뒷산에서 마을 주민 수십 명과 독립 만세를 부른 후, 약 8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고 천평리 소재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독립 만세를 계속 고창하였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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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김을경(金乙卿), 이중곤(李重坤), 권재학(權在學) 등이 주동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이끌고 소이면사무소까지 행진하였다. 당시 민동식 면장을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토록 권유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계속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주재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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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김을경(金乙卿)과 함께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의 거사를 계획하고, 4백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소이면사무소에 이르러 김을경과 함께 면장 민동식에게 “너도 조선 사람이니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자”하고 시위 군중과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는 등 활약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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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서 김을경(金乙卿), 이중곤(李重坤), 권재학(權在學) 등이 주동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소이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장을 끌어내어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고 있을 때, 왜경이 주도자를 연행하자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시위 군중은 돌을 던져 주재소 유리창을 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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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계몽운동가. 사립학교인 통명학교(通明學校)는 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는 무극초등학교이다. 1906년 4월 5일 조동환(趙東煥)을 교장으로 무극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나, 1907년 6월 1일 이필영이 설립자 겸 교장이 되어 1909년 8월 31일에 통명학교를 설립하여 인가를 얻어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수업 연한은 4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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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0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서 3·1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고, 4월 2일 삼성면 천평리 배알미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재판 기록을 보면, ‘임백규, 임경순의 선동에 응하여 4월 2일 밤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 소재 면사무소에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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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효칙(孝則). 생원 장언구(張彦玖)의 아들이며, 부인은 청풍유씨(淸風劉氏)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채유종(蔡有終), 조웅(趙熊) 등 여러 사람과 의병을 일으켜 5백여 명을 모아 6년간 싸우면서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였다. 1597년(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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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현근은 190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에서 장원기(張遠基)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옥구, 자는 명옥(鳴玉), 이명(異名)은 송진표(宋鎭杓)이다. 개성상업학교 재학 중에 의주 신조준(申肇峻)의 딸 신정숙(申貞淑)과 결혼하였는데, 장인 신조준은 만주에서 독립 항쟁한 인물이다. 1926년 개성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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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에 음성읍 초천리 백양 백양서당(栢陽書堂) 훈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서당 학생이던 정민영(鄭玟永), 최만득(崔萬得)과 아들 정대영(鄭大永)의 1919년 3월 28일 음성시장에서의 시위를 도와주는 등 음성 지역에서의 3·1운동에 이바지하였다. 공은 평생 일본인을 ‘왜놈’이라 증오하고 한일합방 후 들어온 양말을 ‘왜말’이라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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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민영은 1901년 1월 7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881번지[초천로174번길 19-7]에서 문묘 직원이던 정모선(鄭謨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70년 12월 6일에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191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백양서당에 다니고 있던 정민영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영익(金榮翼)으로부터 3·1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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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90년 9월 27일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에서 출생하였으며, 1971년 11월 28일에 향년 82세로 별세하였다.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으며,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 노령에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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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시조 정배걸의 31세손이고, 내급사공파의 증좌승지 정인호(鄭仁鎬)의 현손이며, 정인성(鄭寅晟)의 아들로 음성군 금왕읍 내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군소(君素)이며 본관은 초계이다. 정이헌은 1896년에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의병진에 가담하여 충주 금목(金目)[금왕읍 쌍봉리] 일대에서 의병의 모집 및 전투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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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본관은 초계. 자는 행원(行源), 호는 농은(農隱). 내급사공파의 참봉 정국로(鄭國櫓)의 11세손이다. 조부는 중추부사 정민수(鄭民秀), 아버지는 정인희(鄭寅羲)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내송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인은 성주현씨(星州玄氏) 현광일(玄光一)의 딸과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을사륵약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궐기할 때 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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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관식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1921년부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4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5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경기도 경찰간부로 복무하다가, 대한국군준비위원회 부회장으로 창군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이승만 박사의 경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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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순창(淳昌). 형은 조복(趙服)이다. 조반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형 조복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월고산(月高山) 국사봉(國師峯)[소이면 금고리 소재]에서 힘을 다해 왜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우목야(牛牧野)[소이면 갑산리 소재]에서 형과 함께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으로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증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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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순창(淳昌). 동생은 조반(趙胖)이다. 조복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동생 조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월고산(月高山) 국사봉(國師峯)[소이면 금고리 소재]에서 목숨을 바쳐 왜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우목야(牛牧野)[소이면 갑산리 소재]에서 동생과 함께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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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94년 9월 9일에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에서 조태영(趙泰永)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서울시 종로에서 살았다. 1950년 7월 15일 6·25전쟁 시에 폭탄에 맞아 57세로 전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에 있다. 조윤식은 서울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독학하면서 주권 회복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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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한양. 아버지는 조희윤(趙喜允)이다. 1875년 8월 14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조병관(趙炳觀)의 양자가 되었고, 1956년 6월 25일 향년 82세로 별세하였다. 1907년 8월 23일 33세에 조응삼은 관북창의대장(關北倡義大將) 정봉준(鄭奉俊) 휘하에 입진(入陣)하였다. 강원도 원주를 중심으로 1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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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규동은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윤규섭, 유근배, 남상엽, 김시중 등과 흑민단(黑民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조직이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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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의병. 최난수는 임진왜란때에 충청북도 음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서도 조정의 포상을 사양한 뒤 전사한 의인이다. 최난수(崔鸞壽)은 고려 좌참찬 최유경(崔有慶)의 5세손이고, 선략부호군 최우령(崔禹齡)의 아들이다. 최난수는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반인후(潘仁後)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전과를 올렸다.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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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7년 2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봉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당시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읍 읍내리 409-1번지에 거주하면서 잡화상을 하였다. 1970년 9월 9일에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 추성렬은 1919년 4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한내 장터에 운집한 군중에게 독립 만세 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한 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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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부친상을 당하여 미처 탈상하지 않았는데 이어서 모친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살이를 하는데 범이 와서 보호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집에다 ‘이왕가지민하석환(李王家之民河碩煥)’이라고 문패를 달고는 세금도 내지 않고, 호적도 등재하지 않았다. 이에 음성경찰서에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불응하고 단식...